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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제6부. 구원론(1)-기독교교리(7)/김효성

by 싯딤 2009. 4. 25.

제6부. 구원론

구원론(Soteriology)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 적용하시는 과정을 정리한다. 구원론은 성령의 사역론이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구원의 필요성과 방법과 결과 등의 주제들을 포함한다. 이 주제들은 하나님의 복음 전체의 요약이다. 이 셋 중, 구원의 필요성은 신론과 인간론에서, 구원의 방법의 일부인 선택과 속죄는 신론과 기독론에서 다루어졌다. 구원의 방법의 나머지는 구원론에서, 구원의 결과는 교회론과 종말론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구원론에 관한 주요 성경들은 로마서(믿음, 칭의, 양자, 성화, 영화), 갈라디아서(칭의),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중생, 양자, 성화), 에베소서(성화), 야고보서(성화) 등이다.

구원론의 주요 주제들

1. 하나님의 은혜

2. 부르심, 신비적 연합

3. 중생重生

4. 회개와 믿음

5. 칭의稱義와 양자養子

6. 성화聖化

7. 성도의 견인堅忍과 영화榮化

1. 하나님의 은혜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호의와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를 구분한다.

일반 은혜(common grace)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나 택하시지 않은 자들이나 구별 없이 함께 누리는 은혜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특별 은혜(special grace)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활동이시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Pelagius)는 하나님의 영께서 사람의 의지에 직접 역사하지 않고 오직 간접적으로만 역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반대로 어거스틴(Augustine)은 사람의 전적 부패와,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주권적 활동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령의 주권적 활동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며, 사람이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지에 직접 역사하셔서 사람의 영혼을 중생시키시는 선행적 은혜와, 하나님께서 중생한 영혼과 협력하여 그로 하여금 선을 행케 하시는 후속적 혹은 협력적 은혜를 구별하였다.

중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을 인정하는 어거스틴주의를 취하든지, 구원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적 결과로 보는 소위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를 취하였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성례를 통해 주입된다는 소위 성례주의를 발전시켰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루터(Luther)와 칼빈(Calvin)은 어거스틴이 주장한 성경적 은혜의 개념으로 돌아갔고 성례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러나 후에 루터파는 루터의 입장을 떠나 반펠라기우스주의적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의 경향을 보였다. 칼빈을 따랐던 개혁교회는 성경적 은혜의 개념을 보존하였다. 칼빈은 또 처음으로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를 구별하였다. 유아 세례를 부정했던 재세례파(再洗禮派, Anabaptists)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자연과 은혜를 대립시켰고 자연의 질서를 불결하다고 보았다. 또 그들은 국가의 권위를 무시했고 전쟁을 반대하였다.

17세기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는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를 구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와 구원을 위해 충족한 은혜를 주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이 충족한 은혜가 곧 일반 은혜요 구원하시는 은혜이다. 만일 하나님의 이 충족한 은혜가 구원하시는 은혜가 아니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회개의 원인은 성령과 협력하는 사람의 의지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반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은 신인협력설이다. 개혁교회의 도르트 회의는 알미니우스주의를 정죄하고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적 사역을 고백하였다.

근래에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개혁교회 안에서도 헤르만 훽스마(Herman Hoeksema)는 은혜라는 말을 하나님의 구원적 은혜에만 적용하고 일반 은혜는 은혜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반 은혜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몇 가지 점들에서 고찰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여러 가지 자연적 혜택들을 주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다. 사도행전 17:25,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그는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신다. 마태복음 5:44-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또한 그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때를 따라 식물을 주시며, 또 결실의 때를 주셔서 여러 식물로 사람의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주신다. 시편 145:9, 15-16,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사도행전 14:16-17,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와 재능을 주심으로써 문화적 혜택을 누리게 하신다. 그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다(창 1:28).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문화 명령을 받아 땅을 정복하며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 일찍이 가인의 자손들 가운데 야발은 목축을 시작하였고, 유발은 악기들과 음악을, 두발가인은 철공업을 개발하였다(창 4:20-22).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지혜의 영을 주셔서 아론의 옷을 만들게 하셨고(출 28:3)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세워 성막의 여러 기구들을 만들게 하셨다(출 31:1-11). 현대인들이 누리는 주택, 전기와 수도, 교통과 통신, 출판, 의술 등의 문화적 혜택들은 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적 마음, 즉 신(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생각을 주셨다. 로마서 1:19, 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사도행전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 의식을 주셨다. 그것은 사람의 양심에서 나타나며 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악 보응의 일들을 통해 강화된다. 양심은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해 두신 하나님의 율법과 같다(롬 2:14, 15). 멜리데 섬의 토인들 속에도 살인자는 공의의 보응을 받는다는 도덕 의식이 있었다(행 28:3, 4). 또 세상의 정부들이나 사회적 여론은 사람들의 도덕 의식을 반영한다. 로마서 13:3, 4,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이러한 종교적 마음과 도덕 의식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선과 의를 행하며 세상의 악들은 상당히 억제되고 극단적 부패나 혼란이 방지된다. 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어느 정도 지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특별 은혜

하나님의 특별 은혜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내리시는 구원의 은혜이다. 이것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활동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죄인들 중의 일부를 선택하심이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께서 택자들을 부르셔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적용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도들의 구원의 전 과정은 성령의 활동이다. 구원론은 성령의 사역론이다.

성령의 세례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강림하셨다(행 2장).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과정에서 한 시대적 분기점을 이루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성취이었다(사 32:15; 겔 36:27; 욜 2:28, 29; 요 14:16, 17; 15:26; 16:7, 13). 또 그것은 성령께서 교회 가운데 거하시기 시작한 사건이며(요 14:16) 성령의 활동 시대가 시작된 사건이다. 이러한 점들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성령을 받은 사건이라는 일반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신자가 성령을 받는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건은 그 후 시대에 계속 반복된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전도를 듣고 믿은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내려오셨듯이(행 10:44), 죄인이 구원받을 때마다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오신다.

신자가 처음으로 성령을 받는 일을 성령의 세례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에 세 번 사용된(행 1:5; 11:16; 고전 12:13) ‘성령의 세례’라는 말은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시는 사건을 가리킨다. 이것을 ‘성령의 세례’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때문이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내주하심(요 14:17)이나 성령의 기름 부으심(요일 2:20)과 동일하다. 신자가 성령을 받는 것은 중생할 때이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 이전에는, 중생한 것과 성령받는 것이 시간적으로 달랐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이미 깨끗함을 얻었지만(요 13:10; 15:3)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요 7:39). 그러나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그런 구별이 사라졌다.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 로마서 8:9,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신약에는 성도들을 위해 성령을 받으라거나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과 같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그는 우리에게 더 오실 수 없다.’ 단지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단지, 사도행전 8장에 증거된 사마리아 교회의 경우는 예외적이었다. 사도행전 8:15, 16은 그 교회의 경우가 예외적이었음을 증거한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오직 . . . 만’이라는 표현은 그 당시 다른 곳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이 동시적이었음을 보인다. 그러나 사마리아 교회는 예외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그 교회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반쯤 이방인이었다. 또 그 곳에 복음을 전했던 사람은 사도들 중 한 사람이 아니고 집사 빌립이었다. 이런 점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교회에 성령의 강림을 지연시키셨던 것 같다.

성령께서 오신 목적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오시는 목적은 구원을 위해서이다. 그것은 중생과 칭의와 성화를 다 포함한다. 우리의 구원의 전 과정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활동하심의 과정이다.

성령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을 중생시키시고 의롭다고 인치신다. 요한복음 3:5,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또 성령께서는 신자들 속에 영원히 계셔서 그들의 죄성을 이기고 그들로 하여금 성화를 이루게 하신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위로자, 격려자, 돕는 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에스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 율법]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로마서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13, 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로마서 8:26,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성령의 충만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았지만(롬 8:9) 성경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교훈한다(엡 5:18).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플레루스데 πληρούσθε, 현재 수동태 명령법)는 ‘계속적으로 혹은 반복해서 성령으로 충만케 되라’는 뜻이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가리킨다. 성령의 충만함은 어떤 이상한 체험이 아니고, 성도들의 정상적 경건 생활의 과정이다. 성도는 그의 모든 죄악과 연약을 철저히 고백하고 버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만 의지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된다.

특히 성령의 충만함은 전도와 봉사의 능력과 관계된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과 성도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행 4:8, 31). 누가복음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활동으로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의와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그 은혜를 사모하자.

2. 부르심, 신비적 연합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받는 구원은 어떤 순서와 단계로 이루어지는가? 사람의 구원은 크게 말하면 하나님의 예정과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진다. 로마서 8:30은 구원의 순서를 예정, 부르심, 칭의, 영화로 표현한다. 구원의 순서를 좀더 자세히 구분한다면, 부르심, 중생, 회개와 믿음, 칭의와 양자, 성화, 성도의 견인, 영화 등으로 말할 수 있다.

천주교회는 구원의 은혜를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로, 충족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인데 사람은 이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둘째로, 협력 은혜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그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려고 결심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로, 주입 은혜란 세례를 통해 초자연적 덕성이 주입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은혜를 통해 사람이 중생하고 의로움을 얻는다고 한다. 의로움은 순종과 선행으로 보존되고 불신앙과 죽음에 이르는 죄를 인하여 잃어버릴 수 있지만, 고해성사와 관면寬免과 보속補贖으로 다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관면은 죄책과 영원한 형벌을 제거하고 보속은 현세적 형벌을 제거한다고 한다.

루터파는 구원의 순서를 외적인 부르심, 깨닫게 하심, 회개, 중생, 믿음, 칭의, 양자, 신비적 연합, 성화, 보전 등으로 본다. 알미니우스파는 구원의 순서를 외적인 부르심, 회개(복음에 대한 순종), 믿음, 칭의, 중생, 성화(계속 순종할 때), 성도의 견인(믿고 순종할 때만) 등으로 본다.

부르심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표현한다. 로마서 1:6, 7,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고린도전서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베드로후서 1:10,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시고 초청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마가복음 16:15,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께서는 구원을 잔치에 초청하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마태복음 22:1,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태복음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마태복음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누가복음 14:16,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누가복음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이 부르심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차별 없이 주어진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요한계시록 22:17,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마가복음 16:15,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율법의 요구가 진실하듯이, 구원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진실하게 부르시며 초청하신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이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 마가복음 16:15, 1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외적 부르심이, 비록 구원을 받으라는 부르심이기는 하지만, 구원하시는 부르심은 아니다. 외적 부르심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나타낼 뿐이다. 로마서 2:4, 5,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이 사람의 완전한 자유 의지의 응답으로 효력있게 된다고 보았다. 중세 시대의 반 펠라기우스주의자들(다수의 천주교 신학자들)이나 종교개혁 이후의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이 사람의 협력으로 효력있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경이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증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은 사람의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성령의 활동이 없이는 효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이 사람의 구원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표현하는 것은 단지 외적 부르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있게 부르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내면적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은 이것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표현한다. 이 부르심은 중생과 동일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1문답, “효력 있는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영의 하시는 일인데, 그것에 의해 그는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권하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내면적 부르심은 주권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불가항력적 은혜,’ 즉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이끄시면 죄인들은 그에게로 나아올 것이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또 이 부르심은 불변적이다. 그가 한번 불러 구원하시면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

성경은 또한 구원을 연합의 개념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른다. 신비적 연합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초자연적 활동으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은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생명을 찾고 그 생명 안에 포함된 모든 복과 특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신비적 연합을 구원 과정 전체의 기초로 보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을 부르심이나 중생과 동일한 사건으로 본다. 벌코프는 말하기를, “신비적 연합은 중생과 칭의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나,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다”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신비적 연합으로 구원의 충만한 복이 성도들에게 전달된다.

성례주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미신적으로 이해한다. 소시너스파는 그것을 선생과 제자, 혹은 친구들 사이의 사랑의 교제와 같은 정도의 것으로 가볍게 취급한다. 신비주의는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육신적 연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거기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구별이 없어진다. 그러나 개혁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영적, 신비적, 그러나 인격적 구별이 있는 연합이라고 이해한다.

성경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여러 구절들에게 증거한다.

첫째로, 성경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신비적 연합을 포도나무와 몸의 비유로 말한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에베소서 1:22, 23, “그「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자신을 위해 완성시키시는」 자의 충만「완성」이니라.” 에베소서 4:15,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둘째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성도들은 그가 영으로, 생각으로, 정신으로, 마음으로, 말씀으로 그들 속에 계심을 인정한다. 요한복음 15:4, 5,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내가 저 안에 있으면.” 로마서 8:9, 10,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고린도후서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갈라디아서 2: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빌립보서 1:2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골로새서 1:27,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 이 신비적, 영적 연합은 참으로 놀라운 복이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의 생각 안에, 그의 마음 안에, 그의 사랑 안에, 그의 보호 안에, 그의 능력 안에 있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로마서 16: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고린도전서 3:1,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고린도전서 15:18,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 고린도전서 15:22,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갈라디아서 1: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 에베소서 2:6,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3:6,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빌립보서 4: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골로새서 1:2,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골로새서 1:28,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2: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 데살로니가전서 4:16,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요 특권이다.

3. 중생重生

성경은 구원을 또한 중생(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중생이란,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사람이 되고 새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은 중생을 ‘하나님께로서 남,’ ‘거듭남,’ 혹은 ‘성령으로 남’이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 1: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3:5, 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야고보서 1:18,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아페퀴에센).” 디도서 3:5, “중생의(팔링게네시아스 παλιggενεσίας)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여 중생은 마음의 시초적 변화로서 하나님의 단독적(monergistic) 사역이며, 회심은 중생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생을 하나님의 단독적, 주권적 사역으로 본 것은 성경적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의 사상이었고, 오늘날 개혁신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중생과 칭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는 중생을 사람이 자기 생활과 습관을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행위 정도로 보았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다. 교회 역사상 어떤 이들은 중생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를 신인협력설( synergism) 혹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라고 부른다. 근세에 나타난 알미니우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이런 견해와 같다. 한편,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부패성이 제거되고 의가 주입(注入)됨으로써 중생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세례중생설 혹은 주입은혜의 교리라고 한다.

중생의 성격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져 있다. 로마서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죽은 영혼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고 하나님의 활동에 협력할 수도 없다. 죽은 자는 중생 시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 중생에 있어서 그는 전적으로 피동적, 수동적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나오라’고 불러내실 때 죽은 나사로가 주의 음성에 협력할 수 없는 것과 똑같다. 선지자 에스겔이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 대언할 때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그것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겔 37장).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 주권적 활동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중생에서 사람은 전적으로 피동적이다. 중생에서 사람의 의지는 협력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을 중생시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증거한다.

에스겔 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요한복음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5, “물과 성령으로(엑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 나지 아니하면.” ‘성령으로’(πνεύματος)라는 말은 중생에서 성령께서 원인자이심을 보인다. 에베소서 2:1, “[하나님께서] 허물들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들을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4, 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3: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생시키실 때 주로 복음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성경은 말씀을 중생의 수단이라고 표현한다. 야고보서 1:18,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유아들의 경우는 다르나, 성인들의 경우, 중생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과 동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편에서는 오직 전도에 힘써야 한다.

중생은 사람의 영혼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중생한 영혼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중생은 중생한 자의 이전 영혼이 새 영혼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이다. 그의 영혼은 동일하다. 단지 그의 영혼이 중생으로 새로워진 것이다. 또 중생은 영혼의 지정의의 기능들 중의 일부 혹은 전부가 단지 새로워지는 정도도 아니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산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한다. 중생은 중생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존재로 완전하게 변화되는 사건도 아니다. 사람은 중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것은 성경도, 경험도 증거하는 바다.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 성향(governing disposition)의 변화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중생은 “새 생명의 원소를 인간에게 심으시고 영혼의 지배적(혹은 주도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한다. 촬스 핫지의 설명도 비슷하다. 중생 사건에서 하나님의 영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 속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고,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영혼의 성향, 의향, 즉 마음가짐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마음을 받는다. 비록 옛 죄악성이 그의 인성에 남아 있어 자주 실수하고 실패하기도 하지만(롬 7장), 그의 영혼의 이 새 성향은 의를 지향하고 의만 지향한다. 그것은 다시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악성에 굴복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이다.

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에베소서 4:22-23,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즉 새 생명]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중생의 증거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중생한 자는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돌이키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게 된다. 요한일서 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7,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복음 1:12, 13, “영접하는[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16의 말씀도 요한복음 3:3, 5의 중생에 대한 말씀과 관련해 생각하면, 중생으로 얻게 되는 영원한 새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확증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일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중생한 영의 범죄 여부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생한 영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입어 다시 살았으므로 그것이 범죄한다면 다시 죽어 그리스도의 대속이 무효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은 범죄할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영이 아니고 심신(心身, 몸과 마음)이다. 영과 심신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며 죄성은 심신에게만 있고 영은 완전 성결하다. 믿는 사람에게 영의 구원은 이루어졌으나 육의 구원은 아직 안 이루어졌으므로 그의 심신은 중생한 영의 지배를 받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 견해가 의지하는 주요 근거 구절은 요한일서의 다음 몇 구절이다: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한일서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견해를 가지는 자들은 이상의 구절들이 중생한 영에 관해 가르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견해의 문제점은, 영과 마음(心)이 별개의 존재로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전통적 개혁신학이 이해하는 대로, 사람은 영(프뉴마) 혹은 영혼(프쉬케 ψυχή)과, 육체(소마)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고, 마음은 영의 기능이다. 육체는 물질적 실체이며 자체적으로 지정의의 기능을 가질 수 없다. 물론,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이 순전히 영의 활동뿐인가 하는 질문은 정당한 질문이며, 그것에 대해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은 순전히 영의 활동만은 아닐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마음은 육체와의 결합 속에서 생성된 마음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영육의 존재적 분리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육체와 분리된 영에 대해서만 무엇을 논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주석적으로 볼 때, 요한일서의 구절들은 이 견해에 대한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요한일서의 구절들은 실상 중생한 영의 문제가 아니고, 중생한 사람의 문제이다. 더욱이, 만일 그 구절들이 중생한 영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요한일서 전체 교훈에 비추어 볼 때 필요성이 없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중생한 성도가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요한일서의 교훈의 강조점에서 볼 때 실제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생한 사람이 범죄치 않고 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강조점이다.

요한일서의 표현들은 동사의 현재시제의 현재진행적, 반복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요한일서 3:6의 말씀은 주 안에 거하는 자, 즉 중생한 사람이-중생한 영이 아님-현재진행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범죄하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잠시 넘어졌을지라도 즉시 일어나 회개하고 의롭게 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는 요한일서 3:9의 말씀도 중생한 자가 계속 죄를 짓고 있거나 죄 가운데 살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새 생명이 그 속에 심어졌고 그 새 생명은 거룩하고 의롭게만 살려는 새 성향이기 때문이다. NIV 영어성경은 이 구절들을 그런 뜻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중생한 자가 범죄하면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가 무효화되리라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적인 칭의와 실제적인 성화를 오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한 자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법적 책임은 이미 제거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하고 영원한 의를 받았다(롬 3:21-22). 그러므로 중생한 자는 아직 죄성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범죄하기도 하지만, 그의 성화의 전 과정은 실상 죄책이 없는, 결코 정죄될 수 없는 과정이다(롬 6:14; 8:1).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는 단순히 중생한 자의 영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영육의 인격 전체에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다. 성도의 중생뿐 아니라 또한 성화와 영화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구원과 육의 구원을 분리시켜 중생한 자의 현실적 죄 문제에 연관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모든 죄 곧 영육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말은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 역사적 개혁신학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생한 자에게 있어서 육과 분리된 영의 순결성 혹은 완전성을 추론하는 것은 가능하다. 베드로전서 2:11,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카타 테스 프쉬케스) 싸우는 육체의 정욕(톤 살키콘 에피두미온)을 제어하라.” 이 구절은 ‘육체의 정욕’과 ‘영혼’을 구별하고 대조시킨다. 이것은, 육체 혹은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대조시키는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5장의 구절들(롬 8:4-6; 갈 5:16-17)과 다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7문답은 “신자들은 죽을 때 그리스도께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신자들이 죽을 때 그 영혼들은 완전히 거룩해지며 즉시 영광으로 들어가고, 그 몸들은 그리스도와 여전히 연합된 채 부활 때까지 그들의 무덤들에서 쉽니다”라고 하였다. 신자가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해진다는 생각은, 육체와 분리된 중생한 영의 완전한 순결성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비록 성경이 육체와 분리된 중생한 영의 순결성을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 가능성은 추론할 수 있다고 본다.

유아들의 구원 문제

의식적으로 회개하거나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유아 때에 죽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유아 때 죽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진술하기를, “우리는 유아 때에 죽는 모든 사람이 은혜의 선택에 포함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어느 방법으로나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 중생하며 구원얻는다고 믿는다”라고 하였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유아 때에 죽는 모든 사람이 구원얻는다는 것이 복음주의적 개신교인들의 공통적 교리라고 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로마서 5:18-19의 아담 안에서의 인류의 정죄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많은 사람들의 칭의를 든다. 그는 말하기를, “아담의 모든 후손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명백히 드러난 자들 외에는 다 구원받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유아들만 구원을 얻는다고 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3-4, “유아 시에 죽는 선택된 유아들은 그가 기뻐하시는 때에, 기뻐하시는 곳에서, 또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하고 구원을 얻는다. 또 말씀의 사역에 의해 외적 부르심을 받을 수 없는 그 외의 선택된 사람들도 그러하다.” 우리는 이 두 번째 견해가 성경의 전체 진리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에베소서 1:4-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4. 회개와 믿음

사람은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옴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의 방법이다. 중생(거듭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서 사람의 무의식 세계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의식 세계로 나타나는 것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은 결코 인간편의 어떤 공로적 행위가 아니다.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의 당연한 표현일 뿐이다.

죄를 회개하는 것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인가? 어떤 이들은 믿음을 먼저로 보고(칼빈, 핫지 등), 다른 이들은 회개를 먼저로 본다(죤 머리, 박형룡 등). 논리적으로는 죄를 회개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회개

회개는 사람이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죄로부터 떠나는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회개의 세 가지 요소들

회개는 지정의의 세 가지 요소를 가진다. 첫째로, 회개는 지식적 요소를 가진다. 그것은 죄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사람이 죄를 떠나려면 먼저 죄에 대해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율법과 성령의 역사로 된다. 로마서 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둘째로, 회개는 감정적 요소를 가진다. 그것은 죄에 대한 슬픔과 미움을 가리킨다. 회개는 상한 마음을 동반한다. 사람이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지 않고서는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욥기 42:6,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나캄).”

셋째로, 회개는 의지적 요소를 가진다. 그것은 죄로부터 돌이키는 의지적 결단 곧 죄의 청산을 가리킨다. 이것이 회개의 핵심이다. 참된 회개는 마음의 변화에서 나온 행위의 변화이다. 누가복음 15:20, “(탕자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히브리어슈브 בוּשׁ는 ‘돌아온다’는 뜻이다. 예레미야 3:12, 14, 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시편 51: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마태복음 4:17, “회개하라(메타노에이테).” 누가복음 24:47, “회개와 죄사함이...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사도행전 11:18,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사도행전 3:19, “너희가 회개하고(메타노에사테 μετανοήσατε) 돌이켜(에피스트렙사테)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사도행전 15:3,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데살로니가전서 1:9,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는 단지 죄에 관한(페리 περί) 혹은 죄로 인한(에피) 슬픔의 감정 정도가 아니고 죄로부터(아포 혹은 에크) 돌아서는 의지적 결단과 행위이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반드시 회개의 열매를 동반한다. 마태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맺으라].” 누가복음 19:8, (삭개오의 예)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속여 빼앗았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회개의 성격

회개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일으키신 선한 일, 곧 하나님의 재창조의 행위이다. 시편 85:4,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돌이키소서].” 예레미야 31:18-19,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예레미야 애가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사도행전 11:18,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중생은 사람의 무의식적 세계에서 시작되지만, 회개는 의식 세계에서의 변화이다. 회개에 대한 성경의 용어들은 주로 사람의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회개는 사람의 능동적, 의식적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회개에 있어서 ‘협력자’이며 ‘피동적인 동시에 또한 능동적’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박형룡, 217-218쪽).

중생, 회개, 칭의는 모두 단회적이며, 성화는 점진적이다. 성경에서 ‘반복적 회개’를 보이는 듯한 구절들은 구원의 순서 혹은 단계로서의 회개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일시적인 범죄와 방황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회개는 갑작스러울 수도 있고 점진적일 수도 있다. 누가복음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요한계시록 2:5, 16,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그러므로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3, 19, “회개하라,,,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회개의 중요성

회개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은혜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떠나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말씀을 포함한다.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누가복음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사함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사도행전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사도행전 20:21,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회개는 또한 구원에 필수적이다. 회개는 죄의 깨달음과 돌이킴뿐이므로 죄책과 죄의 형벌에 대한 보상이 되거나 구원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회개는 죄 용서와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 조건이다. 마태복음 18:3, “너희가 돌이켜[회개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3:3, 5,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3, “비록 회개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인, 죄를 위한 어떤 만족이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으로 의지되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은 모든 죄인들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천주교회의 고해성사

천주교회의 고해성사( penance)는 덕과 성례를 포함한다. 덕은 죄를 인한 근심과, 죄를 버리려는 결심과,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려는 의도를 가리킨다. 성례는 통회와 고명과 보속을 가리키는데, 통회痛悔(contrition)는 범죄에 대해 슬퍼하는 행위요, 고명告明(confession)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16세기 천주교회의 트렌트 회의는 고명이 신자의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선언하였다. 보속補贖(satisfacion)은 죄를 갚기 위해 행하는 고행이나 선행을 말한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고해성사는 성경이 말하는 회개와 다르다. 성경은 성도가 자신의 죄를 목사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의 죄를 갚기 위해 고행이나 선행을 한다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완전한 속죄제사에 대한 불신이요 모독이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믿음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잘못된 믿음들

사람들 가운데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로, 성경의 역사적 내용이나 정통적 신조들을 지식적으로만 믿는 것이다.이러한 믿음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야고보서 2:19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씀은 이런 믿음을 가리킨다.

둘째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없는 일시적 믿음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심과 열정이 있지만 새 생명의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실패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주로 감정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더 추구한다. 마태복음 13:20-21에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는 말씀은 이런 믿음을 가리킨다.

셋째는 기적을 경험하거나 기적을 행하는 믿음이다. 이것은 구원을 동반할 수도 있고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태복음 7:22-23에는 이런 믿음에 대해 말하기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였다. 누가복음 17:11-19에 기록된 대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다 병고침의 기적을 경험하였지만, 그들 중 오직 한 명 사마리아인만 예수께 나아와 감사하였다.

참 믿음

참 믿음의 원천

참 믿음은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믿음이다. 알미니우스주의는 믿음을 단지 사람의 행위로만 본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다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조성자이시며, 우리의 믿음은 그의 은혜의 선물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계시한다.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복음 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태복음 16:16-17,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고린도전서 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를 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후서 4:4, 6, “그들 안에서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느니라,” “이는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음이니라.” 에베소서 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2:8-9, “이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며 이것[구원의 사실]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임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originator, 창시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perfecter, 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자.”

소요리문답 86문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복음 중에 우리에게 주신 대로 예수를 영접하고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1, “선택된 자들이 그들의 영혼의 구원에 이르도록 믿을 수 있게 되는 믿음의 은혜는 그들의 마음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이시며, 일반적으로 말씀의 사역에 의해 생겨나고; 또한 그것에 의해 또 성례들의 집행과 기도에 의해, 그것은 자라고 강해진다.

참 믿음의 대상

참 믿음의 대상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 3: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6:31, “가로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참 믿음의 대상은 둘째로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 관한 설명인 복음 진리 간에 어떤 대립이나 충돌이 있을 수 없다. 마가복음 1:15,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6:15-1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참 믿음의 대상은 셋째로 성경 전체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더욱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4:14,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말씀]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요한복음 5:39, “성경책들을 자세히 연구하라. 이는 그것들을 통해 너희가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함이니, 그것들은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원문 직역). 디모데후서 3: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참 믿음의 세 가지 요소들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은 세 가지 요소를 가진다.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자세히 기록하며 증거하고 있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칼빈은 말하기를, “믿음이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며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계시되며 확인된다”고 하였다(기독교 강요 3. 2. 7). 메이천(J. G. Machen)은, 믿음에 대한 오늘날의 비(非)지성적 관념을 비평하면서, “모든 참된 믿음은 지적 요소를 가진다. . . . 어떤 인격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그 인격에 대한 지식을 가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신앙이란 무엇인가?, 40쪽).

천주교회는 ‘명시적 믿음’(explicit faith)에 대해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묵종적 믿음’(implicit faith)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묵종적 믿음이란, 신자가 종교의 몇 가지 기초적 진리들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지만,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지식 없이,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믿으려는 태도만 가지고서 믿는 믿음이다. 그러나 성경은 참 믿음이 확실한 지식을 동반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에, 묵종적 믿음이란 잘못된 개념이다. 지식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그러면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믿음의 지식이 필요한가? 사람은 구원을 위해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그리고 왜 하셨으며, 또 그가 장차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박형룡, 252쪽).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찬동이다. 찬동은 복음 진리에 대해 기쁘게 동의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믿는다’는 말은 어떤 사실에 대해 동의함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4: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히브리어 헤에민 레는 어떤 증거에 대해 승인함을 가리킨다. 죤 오웬은, “모든 믿음은 증언에 대한 찬동이요, 신적 믿음은 신적 증언에 대한 찬동이다”라고 말하였다.

믿음의 세 번째 요소는 신뢰이다. 신뢰란 믿는 내용을 자기 것으로 확신하고 그 내용을 주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인격과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하였다. 히브리어 헤에민 베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의지함을 나타낸다. 시편 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바타크 베도 신뢰의 요소를 강조하는 말이다. 그 외에, 카사는 ‘자신을 숨긴다, 감춘다’는 말로서 역시 신뢰의 요소를 강조한다(시 5:11; 7:1; 11:1; 16:1; 17:7 등). 신약성경에서 피스튜오 에이스는 가장 특징적 구문이다(49회 사용됨). 이 구문은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을 표현한다. 요한복음 3:16, 18, 36, “저를 믿는 자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죤 머리는, “지식은 찬동으로 옮겨가고 찬동은 신뢰로 옮겨간다. . . .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뢰함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맡기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믿음의 의지적 요소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은 믿음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 ② 예수님을 우러러 보는 것(요 3:14-15, 구리뱀을 우러러 보듯이 믿음). ③ 예수께로 나아오는 것(요 6:44, 65). ④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요 6:50-58)(속죄 신앙).

믿음의 의지적 요소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참된 믿음은 순종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야고보서 2:17, 26,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행위로 그 구원을 확증한다. 성도의 의롭고 선한 행위는 구원을 위한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확실한 증거와 표가 된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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