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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제6부. 구원론(2)-기독교교리(8)/김효성

by 싯딤 2009. 4. 25.

5. 칭의와 양자

칭의稱義

성경에서 구원은 칭의(의롭다 하심)로 표현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1은 칭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께서는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되, 그들 속에 의를 부어 넣으심으로가 아니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심으로이며; 그들 안에 이루어진 혹은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에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그의 순종과 만족(satisfaction, 속상贖償)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으로; 그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3문답은 “칭의는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서 그는, 우리에게 전가되고 믿음으로만 받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앞에서 의로운 자로 용납하십니다”라고 한다.

칭의의 성격

칭의는 몇 가지 성격을 가진다. 첫째로, 칭의는 법정적(forensic)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인 것이다. 온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그것은 죄인의 죄책(guilt; 법적 책임)이 없어지고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성화와 비교해 볼 때, 칭의는 죄책이 없어지는 것이며, 성화는 죄성 혹은 부패성이 극복되는 것이다. 또 중생, 회심, 성화는 사람의 내면적, 인격적 변화이지만, 칭의는 사람의 법적, 신분적 변화이다. 칭의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사람 밖에서, 법적으로,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는 칭의의 법정적 성격이 명확히 인식되지 못했었다. 천주교회는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주입을 받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보았고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경은 칭의가 법정적 선언임을 보인다.

칭의 혹은 ‘의롭다 하다’는 성경 용어가 사람을 실제로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것은 다음의 여러 구절들에서 분명하다.

출애굽기 23:7,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신명기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이사야 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의롭다 하다’는 히브리어 히츠디크는 정죄라는 말과 대조되는 법적, 재판적 용어이지, 사람의 내면적 의의 덕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의롭다 하다’는 헬라어 디카이오오 δικαιόω도 법적, 재판적 의미를 가진다. 로마서 8:33, 34,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둘째로, 칭의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골자이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결론을 내리노라].” 로마서 4:4,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셋째로, 칭의는 즉각적이며 완전하다. 로마서 5:1, 9,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원어(디카이오덴테스 δικαιωθέντες, 부정과거분사)는 문법적으로 반복이나 진행의 의미가 아니고 단순한 사건을 나타낸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곧 육신을 좇아 행하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전통본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완료시제).”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τετελείωκεν 테텔레이오켄, 완료시제).”

그러므로 칭의는 믿음의 크고 작음 혹은 많고 적음의 정도에 관계되지 않는다. 작은 믿음일지라도 진실한 믿음이라면 칭의를 얻기에 충분한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하신다.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원죄와 및 세례 받기 전의 모든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되지만, 세례받은 후의 죄들에 대해서는 고해성사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계속적 칭의 혹은 증가적 칭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는 성경적이지 않다. 한편, 신정통주의도 칭의가 즉각적이지만 또한 반복적이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성경적이지 않다.

칭의의 수단

사람은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칭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들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이사야 64:6,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로마서 3:21, “율법 외에”(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 없이’). 로마서 4:4, 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율법의 행위와 관계 없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기조메다 λοgιζόμεθα, 결론을 내리노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엑스 에르곤 노무)가 아니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디아 피스데오스)이다.

그러나 믿음이 의로 간주된다고 해서(롬 4:3, 9), 믿음 자체가 의로 간주된다거나 믿음 자체가 효력을 가진다고 볼 것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칭의의 수단일 뿐이며 그 효력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다시 말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 때문에’(디아 피스틴)가 아니고 단지 ‘믿음을 통하여’(디아 피스테오스)이다. 어떤 이들(알미니우스주의)은 믿음 자체가 의로 간주된다고 본다. 그러나 믿음은 기관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연결쇠와 같다. 물론 객차가 가려면 먼저 연결쇠로 기관차와 연결되어야 하지만, 객차를 끄는 것은 연결쇠가 아니고 기관차이다(박형룡, 구원론, 299쪽).

야고보서 2:14-26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과 충돌한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使者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복음과 야고보의 교훈을 충돌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율법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적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임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율법적 행위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를 구별하며 구원 진리를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참 믿음이 사랑으로 행동하며 의에 순종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로마서 6:17, 18,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한편, 야고보는, 율법 폐기론이나 혹은 그것이 빠지기 쉬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에 반대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선행을 동반함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을 구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죄인이 행함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표현하였고, 이런 문맥에서 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순종의 행위를 인용한 것이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 시대에도 성도들에게 적용되었는가? 그렇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이 은혜의 구원을 암시하였다(창 3:21). 아담과 하와의 아들 아벨은 양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을 의미한다(창 4:4).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는 구약 시대 성도에게도 이 원리가 적용됨을 증거한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없다고 증거한다(롬 3:20). 또 요한계시록에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말하기를, “구약 아래서 믿는 자들의 칭의는, 이 모든 점들에서, 신약 아래서 믿는 자들의 칭의와 동일하다”(11:6)고 하였다.

칭의의 때

신자는 언제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택한 백성들을 위한 칭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속에 계획되어진 것이고 역사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확립되었지만(롬 4: 25), 그들을 위한 칭의가 영원 전에 이루어졌다거나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 온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받은 성도들을 죄 없다고, 의롭다고 공적으로 선포하실 것이지만, 성도들의 칭의가 그 때 이루어진다고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죄인의 칭의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루어진다.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내리실 의롭다는 선언은 그들이 믿음으로 이미 받은 칭의의 확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놀라운 복

칭의는 참으로 놀라운 복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하며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롬 5:1-2). 또한 성도는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롬 6:18, 22). 우리를 억눌렀던 무거운 죄짐이 벗겨졌다. 우리는 옛 죄를 반복해서 고백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과거의 죄를 기억하고 낙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가 심지어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갈라디아서도 이 진리를 분명히 증거한다(특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다시 정죄함이 없다(롬 8:1).

칭의는 가장 큰 보화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때문에 이 귀한 보화와 비교할 때 자기에게 유익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해로 여기며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다(빌 3:7-9). 또 그것은 그가 빌립보서에서 강조한 기쁨의 이유요 성도의 감사와 감격의 삶의 원천이다.

그러나 방종치 말아야

그러나 성도는 반 율법주의 또는 율법폐기론의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율법주의)은 성도에게서 확신과 기쁨과 자유를 빼앗아가고 우리를 율법의 멍에 아래 두지만, 반대로 율법을 소홀히 하고 율법을 범하는 것을 큰 죄로 여기지 않는 생각(반율법주의)도 경계해야 할 큰 오류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이제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롬 6:1-2, 15).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롬 6:18, 22).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죄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하며(갈 5:13), 만일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야고보서는 선한 행함이 없는 입술만의 믿음의 고백은 헛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분명히 구원의 증거이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만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요일 2:3, 4), 중생한 자는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은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요일 3:6, 9-10).

이 모든 말씀을 통해 분명한 것은, 의롭다 하심을 확신하고 그 복을 누리는 자마다 반드시 한가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죄 짓지 말고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양자

소요리문답 34문답, “양자(자녀로 삼으심)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수에 들고 그 모든 특권을 누릴 권리를 가집니다.” 중생이 새 생명의 시작이라면, 양자는 새 신분의 시작이다.

양자의 근거

성도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은 자연적 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자연적 관계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된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시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도 두어 구절에서 그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행전 17:28-29, “너희 시인 중에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히브리서 12:9, “모든 영의 아버지.”

그러나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이러한 자연적 관계에서가 아니고, 특별한 언약적 관계에서다. 신명기 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예레미야 31:9,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요한복음 1:12,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일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중생과 칭의의 구원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12-13,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로마서 8:9, 13-14,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4:4, 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다.

양자의 특권

양자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특권을 누린다. 요한복음 1:12,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너희는 더 이상 외인外人도 아니요 손[이방인]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함께 동료 시민들]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들]이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된 특권은 다음과 같다: (1) 양자의 영을 받아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간다.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프뉴마 휘오데시아스)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라디아서 4:5-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2)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와 공급함을 얻는다. 마태복음 6:31-32,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 징계는 받으나 버림을 당하지 않고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얻는다.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에베소서 1:13,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4) 영광의 천국을 상속받는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後嗣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영생의 천국]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천국, 눅 12:32]을 이을 자니라.”

6. 성화聖化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 구원의 과거적 단계는 중생과 칭의이며 그것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졌다. 구원의 현재적 단계는 성화이며 그것은 예수 믿는 자들 속에서 지금 진행 중이다. 구원의 미래적 단계, 곧 구원의 완성은 영화이다.

성화의 본질

성화聖化(거룩하여짐; sanctification)가 무엇인가?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重生) 의롭다 하심을 받은(稱義) 자들이 그 인격과 삶에 있어서 실제로 거룩해지는 과정을 가리킨다. 소요리문답 제35문답, “성화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일인데,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全人이 새로워지고,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살 수 있게 됩니다.”

전인의 실제적 변화

성화는 전인全人이 새로워지는 것, 즉 영육 전체, 지정의의 전 인격, 전 생활이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이다. 죄는 죄책과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칭의는 우리의 죄책이 법적으로 제거되는 것이지만, 성화는 칭의에 근거하여 우리의 부패성이 실제로 극복되는 과정이다. 또 칭의는 객관적인 사건이지만, 성화는 내면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인격과 삶의 변화의 문제이다. 성화는 사람의 인격과 삶의 실제적 변화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적용하신 법적 의를 성도들이 인격과 삶에서 실제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도들은 법적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도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내용은 지식과 도덕성이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통해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평생의 성화의 정도는 별로 크지 않은 듯하지만, 지식과 깨달음의 차원에서 그것은 상당히 진전된다. 성도들은 일생의 성화 과정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성과 무능함,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을 깨닫는다. 물론 그는 그것과 함께 거룩함과 의로움, 선함과 사랑과 진실함 등의 도덕성에 있어서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레위기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9:2 등).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 .”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2-24, “(받았으니) 곧 옛 생활방식에 관하여 너희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라”(원문 직역).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베드로전서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성화는 성경에서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에베소서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예물과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셨음같이 너희도 사랑으로 행하라”(원문 직역). 골로새서 3:13, “피차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베드로전서 2:21,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점진적이며 불완전함

성화는 점진적이다. 중생은 영적 출생이며 성화는 영적 성장이다. 사람이 출생한 후 자라듯이, 성도는 영적으로 중생한 후에 점점 성화된다. 중생과 회개와 칭의는 단회적單回的이며 즉각적이지만, 성화는 중생에서 시작되어 일평생 동안 계속되는 점진적 과정이다. 야곱의 생애를 흔히 성화에 비교하듯이, 성도의 일생은 성화의 훈련 과정이다. 채소가 자라려면 단지 수개월이 필요하나 참나무는 백 년이 필요하듯이, 성도들의 성화는 오랜 기간과 많은 훈련들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가 점점 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지만, 성화는 매우 더디어 보인다.

또한 성화는 지상에서 불완전하다. 육신의 죄악성은 죽을 때까지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며 경험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도의 구원은 이런 불완전한 성화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단번 속죄의 의(義)에 의존한다. 성도의 성화가 아무리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이루어주신 의에 미치지 못한다. 성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의 때문에 완전하며 성도는 최종적 영화의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성도는 죽을 때 그 영혼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간다. 그것은 성도가 죽을 때 그 영이 즉시 천국에 들어갈 것을 가르친 성경의 여러 구절들(눅 23:43; 고후 5:8; 빌 1:23 등)에 당연히 내포된 진리이다. 거룩한 영이 아니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23은 천국에 올라간 영들을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불렀다. 소요리문답 [제37문] 신자들은 죽을 때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습니까? [답] 신자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 그 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므로 부활 때까지 그 무덤들에서 안식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성도가 지상에서 완전 성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과 경험에 배치된다. 마태복음 6:12, 13,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로마서 7:7-26,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 .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갈라디아서 5:17,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스려 욕심을 내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리며,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원문 직역).

알미니우스파는 의식적 죄만 죄로 간주한다. 그들은 마치 10m 사다리를 놓고 그 꼭대기에 올라가 ‘나는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덕적 표준은 우리가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디 엘 무디는 “사람들은 무죄에 더 가까와질수록 그것에 대해 더욱 적게 말한다”고 말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은 잘 해석해야 한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를 보일 뿐이다. 야고보서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여기의 온전함은 완전 무죄가 아니고, 영적 성숙함을 의미한다. 노아나 욥 등도 완전 무죄한 자들이 아니었다.

요한일서 3:6, 8,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범죄치 아니하나니’라는 말은 중생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중생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까닭은 하나님의 씨 곧 새 생명의 원리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요일 3:9).

성화해야 할 이유

성도는 왜 성화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성화되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성화가 구원의 당연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갓난아기가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정상적인 일이다. 기형아가 아니라면, 아기는 자라게 마련이다. 영적으로도 똑같다. 성화는 반드시 중생, 회개, 칭의를 따른다. 각 사람의 성화의 정도는 다를지라도 성화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치 않는 구원이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이기는 자’라는 말은 성도들 가운데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음을 의미하는가? 중생하고 칭의함을 받은 자들 가운데 성화에 실패하는 자가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참으로 중생한 자, 참으로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세상을 이길 것이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

성도가 성화되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너무 큰 은혜, 즉 너무 귀하고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목표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죄 짓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고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만 행하는 것이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2:1, 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린도전서 6:19, 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후서 5:14, 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성화는 필수적 과정이므로 성도는 자신의 성화를 위해 분발해야 한다.

성화의 방법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됨

성화는 하나님의 전적인, 값없으신 은혜요 그의 하나님의 초자연적 활동이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히브리서 13:20, 21, “영원한 언약의 피로 말미암은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특히, 성령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제 중생시킨 성도들 속에 거하신다. 에스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행하게 도우신다. 요한복음 14:16, 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위로자, 권면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성령은 또한 그들을 도우신다. 성도들은 계속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서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13, 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친절]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 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함

성화는 사람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선행의 능력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인격적 존재로 취급하신다. 사람은 중생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소극적이었지만, 성화에서는 능동적, 자발적, 협력적이어야 한다. 성화에서 인간의 성실한 노력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다.

빌립보서 2:12-13,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매튜 풀(Matthew Poole)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우리는 구원의 일에 있어서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일함으로써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구원의 공로나 값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주께서 풍성하게 완성하신 것을 적용하는 것이며, 구원의 원인이나 근거가 아니고 단지 우리가 구원에 참여하는 과정과 수단일 뿐이다’(Com- mentary on the Holy Bible, III, 691).

로마서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 .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고린도후서 7:1,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데살로니가전서 4:1-3,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더욱 많이 힘쓰라...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베드로후서 1:5-10,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성화의 수단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몇 가지 수단들을 주셨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 및 하나님의 섭리적 지도 등이다.

첫째로, 성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이다. 골로새서 1:28-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여기에 있다. 디모데후서 3:15-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 유익한 책이다.

둘째로, 성화의 또 하나의 수단은 성례이다. 바르게 집행된 성례는 말씀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증거하고 기억케 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큰 은혜와 유익을 준다.

셋째로, 성화의 또 하나의 수단은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영적 도움과 능력을 받을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이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성도의 기도 제목들 가운데 영적 성장, 곧 성화는 매우 중요한, 기본적 제목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넷째로, 그 외에도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섭리적 훈련과 지도는 성도의 성화를 위한 수단들이다. 예를 들어, 직업 현장에서의 훈련, 시험과 유혹, 고난 등이 그러하다. 그것들은 다 성도를 겸손케 하고 성결케 하는 수단들이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성도는 이러한 수단들을 성실히 사용함으로 영적으로 점점 더 자라며 거룩해져야 한다.

성화와 상賞

선행은 구원의 목표인 동시에 성화의 당연한 열매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성령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경은 선행에 대한 상(미스도스 μισθός)에 관해 많이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상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10: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상賞은 각각 다를 것

상은 선행과 봉사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다니엘 12: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태복음 5:11 -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9:16-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19-21,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특히,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 각각 수고하고 충성한 만큼의 상이 약속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3:8, 14,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린도전서 3:12-15의 말씀은 종종 오해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말씀은 일반 성도의 성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사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금과 은과 보석은 바른 성경적 교훈을 말하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그릇된 인간적 교훈을 말한다. 이 말씀의 요지는,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면 마지막 날 상을 받을 것이지만,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지 않으면 자신은 구원 받을지 모르나 자기의 교훈을 받던 자들의 멸망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상(賞)은 하나님의 은혜임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께서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5). 또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고 역사상 아마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종이었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15:10). 또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의 환상 중에 24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계 4:10-11).

더욱이,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는 여전히 예수님의 보혈 공로밖에 없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은 진술하기를, “그들의 순종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능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라도 공로를 쌓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할 수 있기는커녕, 그들이 의무상 해야 할 만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실 상도 그의 은혜이다. 주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마땅한 자들이다(눅 17:10).

7. 성도의 견인과 영화

성도의 견인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끝까지 견딤)은 예수 믿고 구원얻은 사람이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고 그의 영으로 효력있게 부르시며 거룩케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떨어져 버릴 수 없고; 그 안에서 확실히 끝까지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도의 견인의 진리는 다른 말로 구원의 보장에 대한 진리이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보장에 대한 진리란 없고 구원은 신자가 끝까지 지킬 때만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보장에 대해 가르친다.

성도의 견인堅忍(끝까지 견딤)을 명백히 가르치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고린도전서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디모데후서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구원의 일을 포함함]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이런 명백한 구절들 뿐만 아니라, 성도의 견인 교리를 지원하는 몇 가지 중요한 `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이다. 로마서 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에독사세 ἐδόξασε)은 부정과거시제로서 미래의 확실한 사건을 나타낸다. 예정된 자들은 남김없이 다 영화롭게 된다.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디모데후서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둘째,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의 완전성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 .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요한복음 6:39,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로마서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8, 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셋째, 성령의 인치심이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에베소서 1:13, 14,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를 바라며 그를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는 그 얻으신 것의 구속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재번역). 에베소서 4:30,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인치심’은 보증이다. 이렇게 보증된 자들은 중도에 실패할 수 없다.

천국의 기업을 약속하심도 이와 관련된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베드로전서 1:3, 4, “...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를 것이다.

로마 천주교회는 신자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의무적이지 않고 원할 만한 것도 아니며 또 가능하지도 않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되며 고해성사(告解聖事)가 죄사함에 필수적이라는 사상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능한 것으로 본다. 구원의 확신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35, 37-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구원의 확신이 믿음에 본질적 요소인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견해가 나뉘인다. 어떤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 요소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음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믿음의 열매라고 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8:1-4은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주 예수를 참으로 믿으며, 그를 진실히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으로 행하기를 힘쓰는 자들은 그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이 세상에서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 무오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참 신자라도 그것에 참여하기 전에 오래 기다리며, 많은 어려운 일들과 싸울 수 있지만 ... 참 신자들이라도 그들의 구원의 확신이 여러 방식으로 흔들리고 감소되고 중단될 수 있는데...

구원받은 성도가 믿음과 순종 가운데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또 자신의 구원에 대한 보장도 확신하는 것은 확실히 복된 일이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에 대해 여러 가지 잘못된 반론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성화에 대한 권면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물론 성경에는 성화에 대한 권면들이 많이 있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러나 이 말씀들은 권면받는 신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사람의 자발적 행위를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성도를 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편의 근면과 성실한 노력 없이 우리을 보호하신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며, 성도의 견인의 확신은 도리어 성화를 위해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어떤 이의 표현과 같이 “위험한 시간에 불기둥“과 같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배교의 경고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물론 성경에는 배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이 많이 나온다. 마태복음 24:4, 5,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로마서 11:20-22,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나 이 말씀들은 신자들 중에 어떤 이가 배교하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구원의 완성을 위해 경고가 수단으로 사용됨을 증명할 뿐이다. 배교에 대한 경고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배교의 가능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견인의 교리가 배교의 실례들에 반대된다고 반론한다. 성경에는 배교의 실례들이 없지 않다. 디모데전서 1:19, 20,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디모데전서 4:1,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디모데후서 2:17, 18,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베드로후서 2:1, 2,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그러나 배교자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참으로 중생하고 구원얻은 자들이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속하였지만,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자요 도적이요 깨끗지 않은 자이었다(요 6:64; 12:6; 13:10, 11). 히브리서 6:4-6과 10:26-29의 말씀들도 배교의 경고 혹은 실례들에 관련된다고 본다.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성경적이다. 우리가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영화榮化

영화(榮化, glorification)란 신자가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부활 때에 몸까지도 완전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영화된 몸은 죄성이 없고 범죄하지 않고 범죄할 수도 없는 몸이다.

물론, 신자는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한 상태로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은 완전히 거룩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소요리문답 37문답, “신자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완전히 거룩해지며 즉시 영광 안으로 들어가고.” 누가복음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히브리서 12:23, “. . .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그러나 우리의 구원의 최종적 단계는 몸의 구속, 곧 우리의 몸이 영광스런 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8:23,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도의 부활의 몸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범죄할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고, 다시 범죄할 수 없고 다시 죽을 수도 없는 몸이다. 누가복음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부활의 몸은 썩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영적인 몸이다(고전 15:42-44, 49). 그 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닮은 몸이다. 로마서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빌립보서 3:21, “그가 . . .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요한일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런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로마서 8:18-23에 증거한 대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며 탄식하고 있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 그 곳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아픈 것도 없다. 그 세계는 현재의 이 세계가 완전히 새로워진 세계이다(계 21:1-5).

우리가 받은 구원은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로 말미암아 이미 법적으로 거룩해졌고(고전 1:2; 히 10:10) 도덕적으로 완전해졌다(히 10:14). 그것이 칭의이다. 성화란 구원받은 성도에게 법적으로 이루어진 그 거룩과 의를 그의 인격과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성도의 성화가 이 땅 위에서 매우 더디게 이루어지고 심히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완전한 의 때문에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인으로 간주된다. 성도의 미래의 영광은 그의 불완전한 성화의 정도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전한 의에 근거한다.

영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내포된 바이다. 로마서 8: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성도들의 영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고 몸에도 관계된다. 장차 성도들이 가질 영광스런 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의 결과이다.

마태복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거룩한 삶의 결과를 단순히 ‘영생’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부르심의 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로마서 6:22-23,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브라베이온 βραβείον, prize)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주실 상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비교될 수 없다.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은 부족투성이며 불완전하나, 하나님의 구원은 영화롭고 완전하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은 그의 은혜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이 주신 영화롭고 완전한 구원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구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세의 상급과 영광의 차등을 암시한다. 성도들이 지상에서 행한 선행과 봉사에 대해 천국에서 차등하게 보상을 받을 것이므로 성도가 내세에 누릴 영광도 차등이 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상급의 차등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앞에서 살펴본 바가 있으나, 몇 구절을 다시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누가복음 19:16-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헤프는 그의 개혁파 교의학에서 역사상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 피스카토(Piscator), 부칸(Bucan), 코체유스(Cocceius) 등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그들은 성도들이 내세에 누릴 영광의 차등에 대해 말했다. 코체유스는 말하기를, “영광에 있어서 개인들에게 차이가 있을 것이나 질투함이 없을 것이며, 가장 큰 영광 곧 머리의 영광이 모두에게 흘러넘칠 것이다”라고 했고, 그는 또 “영광에 있어서 또한 등급들이 있을 것인데, 행위들의 공로에 따른 것이 아니고 각 사람이 세상에서 맺은 의의 열매들에 일치하는 방식으로일 것이다”라고 했다.

헤르만 훽스마와 박형룡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카이퍼, 바빙크, 훽스마 및 박형룡 자신의 견해들도 위에 헤프가 인용한 사람들의 것과 비슷하다. 바빙크는 우리의 합리적 믿음이라는 책에서도 서술하기를,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재능을 사용하는 성실성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큰 영예와 통치권을 받을 것이다(마 24:14 이하)...따라서, 물론 모두가 동일한 복, 동일한 영생, 하나님과의 동일한 교제를 나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과 광휘에 있어서 그들 가운데 차이가 있다. 교회들은 그들의 충성과 열심에 비례하여 그들의 주님과 왕으로부터 다른 면류관과 상을 받는다(계 2-3장)”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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