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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제7부. 교회론(2)-교회운영과 조직-기독교교리(10)/김효성

by 싯딤 2009. 4. 25.

*** 제7부. 교회론(2) ***

5. 교회의 운영과 조직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성도 상호 간에도 연합되어 있는 유기체적 몸과 같지만, 그것은 또한 외적으로 하나의 조직체이다. 교회 안에는 목사와 장로와 집사 등의 직분자들이 있고 각 부서와 기관과 구역 등의 조직들이 있다. 또한 개체교회 외에도 노회와 총회 등의 큰 회의들이 있다. 조직은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지만 필요한 요소이다. 교회의 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무교회주의나 근래의 ‘일터교회’ 개념은 치우친 생각이다.

성경은 초대교회가 어느 정도의 조직을 갖고 있었음을 증거한다. 예를 들면, 세례를 통해 교회 회원이 되는 것(마 28:19), 교회에 시행되고 있는 규례(고전 11:16), 성찬 규례(고전 11:23-26), 교회 집회의 순서들(고전 14:26), 질서의 필요성(고전 14:40), 권징(고전 5장), 헌금의 규례(고전 16:1-2),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위한 자격 규정(딤전 3장), 과부들의 등록과 관리(딤전 5:9) 등의 말씀들이 그러하다.

세 종류의 운영 형태

교회 역사상 교회 운영에 있어서 세 종류의 형태가 있었다. 첫째는 감독주의(episcopalism) 즉 감독들(bishops)이 교회를 운영하는 형태이다. 이 형태에 의하면, 감독은 사도의 계승자로서 교인들을 감독하고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며 일반 교인들은 교회 운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감독은 몇 개의 지교회들을 관할하고 다스리며 또 성직 임명권을 가진다. 성공회와 감독교회(the episcopal church)가 이런 운영 형태를 취하며, 천주교회의 교황제도는 감독주의의 극단적 형태이다.

둘째는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 즉 교인들이 교회를 운영하는 형태이다. 이 형태에 의하면, 목사는 교회의 한 회원에 불과하며 교인들 위에 감독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 따로 없다. 또 개체교회는 독립성을 가지며 그것을 간섭하는 노회나 총회 같은 것이 없고 단지 서로 교제하고 협력하는 협의체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침례교회나 회중교회 등이 이런 운영 형태를 취한다.

셋째는 장로주의(presbyterianism) 즉 장로들이 교회를 운영하는 형태이다. 장로주의에서 장로란 목사와 치리장로를 포함하는 말이다. 장로주의에서 목사와 치리장로는 교인들에 의해 선택되는 자들이므로 장로주의는 대의제도이다. 장로주의는 일반 교인들의 권한과 목사의 권한을 둘 다 동등하게 존중한다. 이러한 운영 형태는 감독주의와 회중주의의 장단점을 보완한 것으로서 성경에 계시된 바에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성경은 목사 혹은 장로들의 직무와 권위를 증거한다. 목사와 장로들은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감독자들’이며, 교인들은 그들이 돌보아야 할 하나님의 양들이다. 즉 목자와 양의 관계인 것이다. 요한복음 21:15-17, “내 어린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다른 한편, 성경은 일반 교인들의 제사장적 권한도 증거한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요한계시록 1:6,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또 초대 교회의 직분자들은 교인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사도행전 6:5-6,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택한다’(케이로토네오 χειροτονέω)는 말은 사람을 뽑기 위해 손을 내민다는 뜻을 가진다. 사도행전 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이와 같이, 성경은 목사와 장로들의 감독자와 목자로서의 직무와 권위를 증거하는 동시에 일반 교인들의 제사장적 권한도 증거한다. 그러므로 이런 진리들은 감독주의나 회중주의에 적합하지 않고 오직 장로주의에 적합하다. 장로주의는 성경이 증거하는 올바른 교회 운영방식이다.

장로주의의 기본 원리들

장로주의의 기본 원리는 다음 네 가지이다. 첫째로, 장로주의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이 교회의 권세의 원천이라고 본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다(엡 1:22). 교회 안의 누구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리고 그의 말씀과 그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둘째로, 장로주의는 주께서 교회의 권세를 교인들 전체에게 주셨다고 본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존귀한 특권을 가짐을 증거한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또 권징의 권세도 교회 자체 즉 회중[교인들]에게 주어졌다.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러므로 지교회에서 세례 교인들의 전체회의인 공동의회는 가장 중요하다. 또 그렇기 때문에 지교회는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나 전입 교인들을 받아들일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셋째로, 장로주의는 교회의 권세가 교인들이 뽑은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행사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대의제도 원리이다. 주께서는 교인들이 선택한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를 돌보며 다스리게 하셨다.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목사와 장로들은 주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를 위탁받은 자들이므로, 교회는 그들을 성경에 교훈된 자격조건에 따라 매우 신중히 선택하고 세워야 하며, 일반 교인들은 세움받은 감독자들을 존중하며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넷째로, 장로주의는 교회의 권세가 지교회로부터 전체교회로 확장된다고 본다. 장로주의는 일차적으로 지교회의 치리회인 당회를 중요시하며, 교회의 치리권은 지교회로부터 노회와 총회 등을 통해 전체 교회로 점차 확장된다고 본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의 참된 교제와 협력을 나누게 되고 또 어떤 지교회가 탈선하지 않도록 상호 감시하고 견제한다. 장로교회에서 당회장이나 노회장이나 총회장은 단지 회의를 인도하는 의장 즉 사회자이며 그 이상이 아니다. 또 도시의 큰 교회들의 목사와 장로들이나 시골의 작은 교회들의 목사와 장로들은 권위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장로주의와 달리, 감독주의는 전체교회를 지교회보다 중시하며 또 총회에서 지교회에 무엇을 명령하는 하향적 성격을 가진다.

지교회의 공동의회는 권징 아래 있지 않는 세례교인들로 구성되며 지교회에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 지교회의 당회는 담임목사와 시무장로들로 구성되며 지교회의 기본적 치리회이다. 노회는 한 지역의 여러 지교회들의 목사들과 장로들로 구성되며, 대회는 더 넓은 지역에서 여러 노회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되고, 총회는 한 나라 안의 교회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된다. 노회와 대회와 총회 등은 상회 혹은 확대회의라고 불린다. 신약성경은 노회와 총회의 예를 보인다. 디모데전서 4:14, “장로의 회의에서.”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회의에서”

지교회의 당회의 권한은 상회 혹은 확대회의와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견제된다. 그러나 장로주의에서 상회 혹은 확대회의는 지교회를 무조건 지배할 수 없고 또 지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사실상, 노회나 총회 등을 ‘상회’라는 부르는 것은 감독주의적 맛이 있다. 총회가 노회에, 또 노회가 당회에, 일방적으로 어떤 명령을 내린다면, 그것은 장로주의적이지 않고 감독주의적이다. 박형룡 박사는, “노회나 대회나 총회가 지교회에 대하여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무엇이든지 부과할 수 있다는 관념은 본질적으로 로마 카돌릭적이다”라고 말하였다(박형룡, 150쪽).

교회의 직분

창설직創設職

신약 교회의 창설 시기에 있었으나 그 후 사라졌던 직분들은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등 세 가지이었다. 이것들을 창설직이라고 부른다. 에베소서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 세 가지 창설직들 중 가장 중요한 직분은 사도이었다. ‘사도’라는 원어(아포스톨로스 ἀπόστολος)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일반적인 뜻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특히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 사용된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사도행전 1: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단지 예외적으로, 신약 원어 성경에서 사도행전 14:4, 14에 바나바에게 사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사도의 자격과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사도는 예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시고 보내신 자이었다. 마가복음 3:13-14,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갈라디아서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사도행전 9:15, “주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둘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직접 본 자이었다. 사도행전 1:21-22,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고린도전서 9:1, “내가 사도가 아니냐? 자유자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셋째, 사도는 주께로부터 기적 행할 능력을 받은 자이었다. 마가복음 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병들을 고치며](전통사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고린도후서 12:12,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참음 중에]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두 번째 창설직은 선지자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아 전달하는 직분이었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사도행전 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세 번째 창설직은 복음전도자이었다. 이것도 신약 교회 창설시기에 있었던 특별한 직분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디모데와 디도 같은 자들이 그러하며, 이들은 일반적 목사나 장로의 직분과 구별된다. 디모데후서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사도행전 21:8, “일곱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

항존직恒存職

창설직과 달리, 사도 시대 이후 주님 재림 때까지 신약 교회에 항상 있어야 할 직분들은 목사와 장로와 집사이다. 이것을 항존직이라고 부른다. 에베소서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행전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빌립보서 1:1,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목사

목사牧師(pastor, minister, reverend)는 넓게는 감독 혹은 장로 안에 포함되며, 교사 혹은 ‘가르치는 장로’라고 표현된다. 에베소서 4:11, “목사와 교사.” 디모데전서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디모데후서 2:2,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목사의 임무는 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고 ② 교인들을 살피며 인도하는 직분이다. 이것은 지교회의 담임목사가 가지는 임무이다. 당회가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는 치리장로들과 함께 교인들을 살피며 감독하며 인도한다. 설교는 목사에게 맡겨진 전문적 일이며 따라서 목사만 신학교육을 받지만, 행정은 치리장로들과 함께 행하는 일이다. 또 담임목사는 목회를 도울 부목사와 전도사 등의 조력자들을 둘 수 있다. 부목사나 전도사 등 목회조력자들은 교인들의 초청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담임목사의 초청과 당회의 승인으로 오기 때문에, 교회의 치리권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담임목사의 목회를 돕는 자들이다.

목사의 자격은 디모데전서 3:1-7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장로의 자격 요건이기도 하며, 모든 성도의 성화의 목표이기도 하다.

“책망할 것이 없으며”-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자.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부부생활의 순결성을 지키는 자.

“절제하며”-술, 시간, 돈, 오락, 힘 등을 절제하는 자.

“근신하며”-무분별하지 않고 침착하고 조심성 있는 자.

“아담하며”-행실이 단정하고 존경할 만한 자.

“나그네를 대접하며”-인정이 있고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자.

“가르치기를 잘하며”-성경에 정통하여 잘 가르치는 자.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술에 중독이 걸리지 않은 자.

“구타하지 아니하며”-성격이 거칠어 남을 때리지 않는 자.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전통본문)-물질 생활에 바른 자.

“오직 관용하며”-편협하지 않고, 이해심과 인내심을 가진 자.

“다투지 아니하며”-이해심과 인내심이 있어 다투지 않은 자.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하나님만 바라며 돈을 사랑치 않는 자.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신앙 단련을 받아 겸손해진 자.

“외인(믿지 않는 자들)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

목사의 권위는 단순히 직분의 권위가 아니고, 그가 전하는 말씀의 건전함과 그의 인격의 모범에서 나오는 권위이다. 성경의 바른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사가 권위가 있고, 그 가르친 말씀대로 살며 모범을 보이는 목사가 권위가 있다. 바른 말씀과 인격적 모범이 없이 목사직의 권위만을 주장하는 것은 옛날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과 같고 거기에서 종종 인간적 횡포도 나온다. 그러나 그런 권위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악하며 가증한 것이다.

신약 교회의 목사는 하나님과 교인들 중간에 있는 제사장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신약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며, 모든 신자의 헌신과 순종의 삶이 다 하나님께 대한 제사이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물론 목사도 제사장이며 목회도 제사이다. 로마서 15:16,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그러나 목사나 목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와 그들의 삶이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서 성직자들을 ‘사제’(priest)라고 불러 평신도와 구별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오늘날 어떤 성직자나 성직계급이 사도직을 계승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천주교회와 영국교회와 감독교회는 일반 신부보다 한 단계 높은 성직자인 주교 혹은 감독(bishop)이 사도직을 계승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

신약성경은 장로와 감독이 같은 직분임을 보인다. 사도행전 20:17, 28,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직분이라는 점에서, 목사가 사도적 기능을 이어받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는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만 제한된다.

목사가 준비할 바는 개인적 성경 통독과 연구, 기도, 가정예배, 독서, 신학교육 등을 통한 교리적 확신과 윤리적 인격이다.

먼저, 목사는 교리적으로 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진리를 바르게 파악하고 확신하여(고전 1:22-23; 2:1-2) 율법주의나 윤리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② 건전한 전통적 개혁신학의 체계를 파악하고 확신하여야 하며, ③ 현대교회의 배교와 타협의 풍조를 분별하고 배격하는 바른 입장과 노선을 정립해야 한다. 덧붙여, 성령론, 종말론, 여성신학 등에 대해서도 바르게 정립해야 한다.

목사는 또한 윤리적으로 다음 몇 가지 점을 명심해야 한다.

① 목사는 물질 문제에 대해 깨끗해야 한다.

목사는 헌금 집계와 지출과 관리에 직접 관여치 말고 신실한 집사들을 세워 그 일을 맡겨 처리하며 당회로 감독케 하고, 또 거리끼는 도움을 받지 말고, 물질 때문에 잘못된 일들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목사가 생활비를 받는 것은 성경적이다. 마태복음 10:10,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고린도전서 9:11, 13-14,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디모데전서 5:17-18,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목사는 사도 바울의 모범을 기억하며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 사도행전 20: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② 목사는 여성도들에 대해 깨끗해야 한다.

목사는 여성도들에게 너무 친근하게 대함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목사는 심방이나 상담 등 목회의 부분들에서 아내와 함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목사가 결혼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성경은 독신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목사는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의 자녀들을 돌아보고 자기의 가정부터 가르치고 아름답게 해야 한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고린도전서 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디모데전서 3:2, (감독의 자격 요건들 중)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③ 목사는 부교역자들과 교회 직원들에게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담임목사는 목회와 행정의 제반사항과 건물비품 관리의 일들까지 지시하고 점검하는 위치에 있고 그런 일들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성실히 행해야 하겠으나 항상 겸손과 사랑과 이해심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행해야 한다. 부교역자들과 직원들도 담임목사의 사역에 유익이 되도록 처신해야 한다.

또한 목사는 목회를 위해 다음 몇 가지 점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① 목사는 성경 연구와 기도로 설교 준비를 철저하게 하되 설교는 자기의 생각을 전하지 말고 성경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실패치 않고 전해야 한다. 설교자는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복음을 전해야 하며, 칭의와 성화, 교리와 생활교훈을 균형있게 전해야 한다. 또 신구약을 골고루 설교하고 가르쳐야 하며 결코 남의 설교를 베껴서 해서는 안 된다.

② 예배 인도는 잘 준비해서 하되, 사회는 꼭 필요한 말만 간략히 하고, 찬송은 미리 선택하고 예배 전후의 반주는 조용하고 경건하게 하게 한다.

③ 마이크 볼륨을 적당히 크게(그러나 너무 크지 않게) 하고 전자오르간 소리를 너무 크고 울리지 않게 하고 성가대원의 얼굴 표정을 기쁘게 하게 한다.

④ 교인수나 헌금액수나 건물의 규모 등 외적 건립에 마음을 쓰지 말고, 영혼의 구원과 성장 등 내적 건립에 마음을 쓴다.

⑤ 부서들을 철저히 감독 관리하고 교회 행정도 짜임새 있게 한다.

⑥ 직분자(장로, 집사)는 신중히 세우고 너무 많지 않게 한다.

⑦ 세례 혹은 전입교인 문답을 통해 교인수를 충실히 늘여간다.

⑧ 전도인들을 모으고 훈련시키되 기본적 성경 구절들을 암송시키고 복음의 요지를 확인시키고 전도 방법을 연구하고 실습시켜 교회 주위를 가가호호 전도하게 한다.

⑨ 주보는 없애든지 검소하게 하고, 교회안내서를 준비하여 초청의 말씀, 복음의 요지, 교회의 기본 신조, 교회 연혁, 목회자 소개, 집회 소개, 위치 약도, 연락처 등을 담은 교회안내서를 준비한다.

⑩ 예배당의 외적 치장을 최소화하고, 예배당의 내부 혹은 외부의 호화로운 장식, 값비싼 음향 장치나 오르간의 설치 등을 삼갈 것이나 예배의 경건한 분위기를 위해 강단 뒤 휘장 색깔을 연한 벽돌색이나 옅은 하늘색이나 군청색 등으로 하며 또 천장의 조명장치을 회중의 눈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한다.

장로

장로長老(elder, presbyter)는 목사와 함께 교회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직분이며 보통 치리장로라고 부른다. 사도행전 20:17, 28,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5:1-2,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성경에서 장로와 감독은 동일한 직분이다. 그것은 교인들을 돌보는 직분 곧 목회 혹은 목양의 직분이다.

장로교회에서 치리장로는 회중을 대표하며 그 권한이 목사와 동등하다. 단지 설교의 직무는 목사에게 맡겨져 있다. 그러나 목사는 실제로 목회에 전념하는 자이므로 목회의 주도적 역할과 책임을 가지며, 장로들은 목회에 협력적 역할을 한다. 목회란 목사가 장로들의 협력을 받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리장로들은 목사의 목회에 제동장치가 아니고 윤활유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가 비성경적 교훈이나 행정을 할 때에는 장로들이 그것을 제어할 책임과 권한이 있다.

지교회에서 장로의 수는 보통 2명 이상이어야 좋다. 이것은 목사와의 의견 대립으로 인한 부작용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사도행전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주후 2세기 사도적 규범(Apostolic Canons)이라는 책은, “교인들은 목사 외에 적어도 2명의 장로들을 지명해야 한다. 모든 교회는 적어도 3명의 집사들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장로의 자격은 목사의 자격과 동일하다. 그것은 디모데전서 3:2-7에 자세히 언급되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한마디로,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신앙인격자로서 교인들의 본이 되고 교인들을 잘 인도할 만한 교양과 덕이 있는 자이어야 한다. 또 장로의 아내들은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딤전 3:11).

집사

집사執事(deacon)는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직분이다. 헌금의 수금, 정리, 계획, 지출 등 교회의 살림살이와 특히 구제의 일을 행한다. 사도행전 6:2-3,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물론, 이러한 일들은 당회 즉 목사와 장로들의 감독과 지도 아래 행해져야 할 것이다.

집사의 자격은 디모데전서 3:8-13에 기록되어 있다. ① 단정하고, ②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③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④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하며, ⑥ 한 아내의 남편이며, ⑦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다. 또 집사의 아내들은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딤전 3:11).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의 문제

오늘날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주장하는 교회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이다.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세속사회의 영향이다.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주장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는, 첫째로 신구약성경에 여선지자 등의 여성 사역자의 예들이 있다는 것, 둘째로 갈라디아서 3:28에 남녀 평등의 원리가 있다는 것, 셋째로 세속사회도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데 하물며 교회가 시대의 조류를 역행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 넷째로 교회 내의 여성들의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또 하나님께서 역사상 변칙적으로 허용하신 것과 교회에 정식으로 주신 규범은 구별되어야 한다.

성경은 결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허용치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디모데전서 2:11-14과 고린도전서 14:34-37은 다섯 가지의 이유를 제시한다.

디모데전서 2:11-14,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 말씀은 여자의 가르치는 일 즉 목사직과 다스리는 일 즉 장로직을 분명히 금하고 있다. 이렇게 금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창조의 질서 때문이다. 여자는 창조될 때 남자의 ‘돕는 배필’ 즉 협력자(helper)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있다. 둘째는 범죄에 대한 징벌 때문이다. 아담은 아내가 주는 선악과를 먹으므로 범죄하였다(창 3:6). 여자는 인류의 타락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여자가 또다시 나서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제약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 두 이유는 어떤 시대적, 환경적 요인들이 아니고, 역사적, 불변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4:34-37,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혹은 ‘너희 아내들’)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이 말씀도 여자들이 교회 앞에 나서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율법의 말씀 때문이다. 34절, “율법에 이른 바와 같이.” 어떤 율법을 가르치는가? 예를 들면, 창세기 2:18,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세기 3: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둘째로 그것은 주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37절, “주의 명령인 줄 알라.” 에베소서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베드로전서 3:1, 5-6,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사도들의 교훈은 곧 주의 교훈이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는 책이다.

셋째로 그것은 교회의 보편적 규율이기 때문이다.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오늘날 파괴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 모든 교회는 이 성경적 교훈과 원리에 대해 이의를 말하지 않았다.

위에 인용한 두 성경 구절(딤전 2:11-14; 고전 14:34-37)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런 교훈을 옛 시대의 사고방식과 풍습에 제약을 받은 사도의 인간적인 발언이나 사상으로 보는 것은, 거기에 제시된 다섯 가지의 이유들의 정당성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글인 신약의 신적 권위에 대항하는 큰 잘못이며 죄악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박형룡 박사는 강조하여 말하기를,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금하는 것은 2천년 전의 한 지방 교회의 풍습이 아니고 만고 불변의 진리라고 하였다(145-148쪽).

남녀 평등과 여성 안수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은 앞에서 인용된 두 성경 구절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구절들은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 남녀 평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의 복에 있어서 남녀가 동등하다는 뜻이다. 또한 신약성경의 만인제사장의 진리도 가정과 교회 안에서 남녀 역할의 차등과 구별을 가르치는 말씀들과 충돌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물론, 신약시대의 복음사역에 여자들의 역할이 컸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누가복음 8:2-3,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예수님과 열두 제자들]를 섬기더라.” 로마서 16장에는 뵈뵈, 브리스길라, 마리아 등 복음을 위해 많이 수고한 여자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는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사명이 있다. 디모데전서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자녀들을 해산함으로써 그 낮은 지위가 회복된다. 훌륭한 남자들의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들이 있다.

임시직

한국 교회는 필요에 따라 위의 세 가지 직분 외에 몇 가지의 직분들을 더 만들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치리권에 따라 행한 것으로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런 임시직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서 교회가 자체의 유익을 위해 임의로 혹은 임시적으로 설치한 직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로, 전도사는 담임목사의 조력자이다. 지교회는 그 필요성과 경제적 여건에 따라 담임목사의 추천과, 당회와 제직회의 승인으로 전도사를 세운다. 전도사는 담임목사의 목회 사역을 돕는다.

둘째로, 권사는 여성도들 중에서 목사와 당회의 지도 아래 병환자와 궁핍한 자와 환난당한 자 등을 심방하여 위로하며 권면하는 직분이다. 한국교회는 비교적 여성도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히 이런 직분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권사는 흠 없이 수년간 신앙 생활을 한 자로서 그의 행위가 복음에 적합하고 생활이 모범되고 건전한 판단력과 주위의 좋은 평판을 가진 자이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남녀 서리집사는 임시로 집사의 직무를 하게 하는 직분으로서 그 임기는 1년이다. 한국교회에만 독특한 이 직분은 본래 집사직을 위한 예비과정이었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3: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무를 하게 할 것이요.” 또 한국의 초대교회에 남성도가 많지 않아서 부득이 여자서리집사도 허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서리집사가 정식 집사로 인식되고 안수집사는 한 단계 높은 직분으로 인식되는 것이나 서리집사의 수가 전체 교인의 수에 비해 많은 것은 잘못된 풍조라고 생각된다. 서리집사 제도는 폐지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본다.

직분으로의 부르심

교회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12:4-5,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어떻게 성도를 부르셔서 어떤 직분을 가지도록 하시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어떤 직분으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직분자들을 부르실 때 옛날처럼(출 3:4; 삼상 3:4-10; 마 4:19; 행 9:4; 13:2) 음성으로가 아니고 내면적 확신으로 부르신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내면적 부르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것이다.

(1) 그 직분을 위해 헌신하려는 간절한 소원.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디모데전서 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 그 직분을 위한 재능과 은사. 로마서 12:6-8,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3) 그 직분을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이런 깨달음과 경험은 주로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추천과 요청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어떤 직분에 부르시는 것은 교회 즉 성도들의 요청과 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가 청하지 않고 찬성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어떤 직분에 임직될 수 없다.

또 교회는 직분자를 세울 때 그에게 안수를 베푼다. 신자는 안수를 통해 그 직분을 위해 구별된다. 안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공식적 증표이다. 사도행전 6:5-6,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사도행전 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 시대의 안수는 성령의 신비한 능력을 수반했던 것 같다. 사도행전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디모데전서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그러나 오늘날 안수는 일반적으로 직분의 구별을 상징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직분의 성격

교회의 직분은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고 봉사의 직분이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큰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이다. 마태복음 20:26-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3:11-12,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므로 교회에서 더 중요한 직분을 가진 자는 겸손히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가장 중요한 표는 겸손이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이, 성숙한 신자는 겸손할 것이다.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들은 다 그러해야 할 것이다.

6. 은혜의 수단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수단인데, 그것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 등이다. 소요리문답 88문답,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택들을 전달하시는 일반적 외적 수단은 그의 규례들,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인데, 그 모두가 선택된 자들에게 구원을 위해 효력이 있습니다.”

은혜의 수단에 대한 여러 견해들

은혜의 수단의 역할에 대하여 역사상 여러 견해가 있었다.

로마 천주교회는,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수단으로 제시하나 성례를 더 강조하며 교회 자체를 은혜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적 은혜가 성례에 객관적으로 들어 있으며, 성례는 ‘행해진 행위에 의해’(ex opere operato) 하나님의 구원적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루터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례보다 강조하며 성례가 가견적 말씀으로서 말씀을 떠나서는 무의미하다고 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이나 성례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자체에 효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은혜의 수단이 자연세계에 속하는 것이므로 영적 효력과 결실을 가져오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수단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은혜의 수단을 무시한다.

이성주의는, 은혜의 수단을 성령의 초자연적 활동의 도구로 보지 않고 단지 도덕적 설득의 도구 정도로 본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은혜의 수단이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은혜의 수단은, 비록 미신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지만, 존중히 여겨지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성화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성경 말씀과 그것에 근거한 설교를 의미한다.

성경 자체의 증거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은혜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밝히 증거한다. 시편 1:2-3,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9:7-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사도행전 17:11-12,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로마서 1: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디모데후서 3:15-17,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율법과 복음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둘이 다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구약성경은 율법을 강조하고 신약성경은 복음을 강조하며, 그 둘은 다 사람의 구원과 성화를 위한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나 구약성경도 의식법을 통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고 신약성경도 은혜의 복음과 더불어 도덕법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성경이 복음이 없는 율법뿐이요 신약성경이 율법이 없는 복음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약 아래서 율법 즉 도덕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첫째로, 율법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 의(義)이다. 율법은 의의 법이다. 둘째로, 율법은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한다. 로마서 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음이니라.” 셋째로, 율법은 사람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갈라디아서 3: 24,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율법과 성도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성도는 구원의 조건으로서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는 율법에서 해방되었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러나 성도는 도덕적 의무로서는 여전히 율법을 지킬 의무 아래 있다. 도덕법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줌에 있어서 여전히 유익하다. 그것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칙이다. 그것은 우리의 성화의 목표요 수단이다. 로마서 7:12, 14,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고린도전서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디모데전서 1:8,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을 단지 도덕적일 뿐이라고 보며 말씀을 통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활동을 부정한다(펠라기우스파나 이성주의). 다른 이들은 성경 말씀의 도덕적인 영향력이 불충분하고 성령의 보충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본다(반(半)펠라기우스파나 알미니우스파). 신비주의는 기록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불필요하다고 보며, 신자 속에 있는 내적인 빛 즉 성령의 내면적 음성만 강조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과 함께 또 그것을 통해 활동하시는 성령의 활동으로 효력을 가진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해 증거한다. 요한복음 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베드로전서 1:23,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그러나 성경은 또 하나님의 영의 활동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요한복음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일차적 수단이므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일은 매우 복된 일이다. 또 성경적 설교는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목사의 성경 연구는 전 생애를 바쳐 힘쓸 일이다. 영혼의 구원과 성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도

또 하나의 은혜의 수단은 기도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영적 은혜들을 받을 수 있다.

기도의 대상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가?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뿐이다. 우리는 보통 성부 하나님께 기도드리지만, 삼위 하나님께 다 기도할 수 있다. 마태복음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한 예들은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누가복음 23:42, “예수께 가로되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전통본문) 사도행전 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고린도후서 12:8, “이것이[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기도의 내용들

기도의 내용들은 감사와 찬양, 죄의 고백, 간구 등이다. 소요리문답 98문답, “기도는 우리의 죄들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그의 뜻에 맞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소원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에게 아뢰는 것입니다.” 구약 시편의 많은 시들(특히 95편 이후)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찬송은 곧 기도요, 기도의 주요한 부분은 찬송과 감사이다.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죄의 고백도 기도이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물론, 기도는 간구의 내용을 포함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간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먼저 영적인 것부터 기도하고 그 후에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구해야 한다. 또한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그 후에 남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다.

마태복음 6:9-13에 기록되어 있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중요한 내용들을 깨닫게 해준다.

① “주의[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② “주의[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임할 영광스러운 천국 뿐만 아니라, 현재의 복음 사역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나라 즉 교회도 가리킨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벧전 2:9).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광스런 천국이 오기를 간구하는 뜻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힘있게 전파되어 택한 백성들이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다시 말해 참된 교회의 설립과 확장을 간구하는 뜻인 것이다. 이것은 곧 전도를 위한, 그리고 전도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에베소서 6:19; 골로새서 4:3; 데살로니가후서 3:1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

③ “주의[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개인의 문제들 뿐만 아니라, 가정, 교회, 사회와 국가, 온 세계의 문제들을 포함하며, 또 정신적, 영적 문제들뿐 아니라, 물질적, 육신적 문제들까지도 포함한다. 이 땅의 이 모든 영역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탄과 악령들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사람의 죄와 불순종도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까지도 그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으로 삼으실 것이다.

④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육신의 양식도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지은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죄사함은 매우 중요하다. 또 주께서는 이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용서해주는 것이 필요함을 교훈하셨다.

⑥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마귀와 죄의 유혹에 떨어져 범죄치 않기를 기도하고 혹시 악에 떨어졌다면 거기로부터 속히 건짐받기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기도의 시간과 장소

기도의 시간에 관하여는, 우리가 어떤 정해진 시간에만 기도할 것이 아니고 언제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로마서 12:12, “기도에 항상 힘쓰라.”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물론, 교회의 공적 모임들, 예를 들어 수요기도회나 새벽기도회는 유익하다.

한국교회의 전통인 새벽기도회는 유익이 많다. 예전과 달리,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부득이한 이유로 늦게 자기 때문에 새벽 4시 혹은 4시 반에 일어나는 것은 어려움이 있고 생활 리듬이 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새벽기도회를 지키는 데는 유익이 많다. 새벽기도회를 통해 성도들은 성경을 더 많이 배우고 날마다 기도하게 되고 교역자들도 성경 말씀을 더 많이 연구하게 된다. 서양의 경건한 사람들도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새벽기도회에서는 인도자가 말씀을 간단히 전하고 각자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도의 장소는 예배당이나 어느 기도원에 국한시킬 것이 없을 것이다. 기도원은 유익하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신약 교회의 예배당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공적 집회 장소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구약의 성전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에 성전 건립을 명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배당은 기도하기에 좋은 곳이지만, 꼭 예배당에 나와 기도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 기도 드릴 수 있다. 어디든지 조용한 곳은 나의 기도의 골방이 될 수 있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빈 들]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기도의 방법

기도의 방법에 대해, 성경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함이라.”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무엇을 간구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유다서 20, “성령으로 기도하며.”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셋째로, 우리는 겸손히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눅 18:9-14). 우리는 자신의 부족과 죄악됨을 항상 인정하면서 겸손히 주의 긍휼을 구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 또 그는 밤에 친구에게 찾아와 떡 세 덩이만 빌려달라고 강청한 한 사람의 이야기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하고 인내하며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눅 11:5- 8; 18:1-8).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도할 때 소리를 조금 내어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묵상 기도는 졸음이나 잡념의 침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인 공적 집회시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소리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의 유익

기도의 유익은 매우 크다. 기도는 영적 성장 곧 성화를 이루며 주를 믿고 따르며 섬기는 힘을 공급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다. 권능은 하나님께 있다(시 62:11).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이룰 수 있다(슥 4:6). 인간편에서는 기도밖에 다른 길이 없다. 마태복음 7: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누가복음 11:13,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기도 생활에 대해 강조했던 경건한 신앙인들의 글들을 인용해본다.

윌리암 윌버포스, “지금까지 나는 개인적인 기도, 묵상, 혹은 성경 읽기의 종교적 훈련을 위해 너무도 적은 시간을 습관적으로만 배당하여 둔 것같이 생각된다. 그 결과로서 나의 영혼은 말라빠지고 냉냉해지고 따라서 굳어지고 말았다.”

리차드 뉴톤,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은 말씀에 합당치 않는 기도 생활의 퇴보에 있다.”

촬스 스펄젼, “세상과의 접촉은 자주 우리의 경건에 더러움을 가져온다. 우리는 멀리 낙원에 가서야 더러움 없는 순결을 볼 것이다. 그 동안 이 세상에서 은혜로운 생활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많이 홀로 있어야 한다.” “밀실의 기도가 봉사 생활에 주는 큰 복은 글로 표시할 수도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성령께로 온 힘이다.”

이 엠 바운즈, “밀실은 설교자에게 참된 교사요 학교이다. 사상은 기도를 통해 광채가 나고 분명해질 뿐 아니라, 기도 중에 생겨난다. 중심에서 나오는 한 시간의 기도는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결과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설교를 하기 위한 성령의 힘은 기도, 즉 시간을 들인 기도에서만 얻어진다..쉬지 않는 기도가 없이는 이 성령의 힘은 결코 설교자에게 임하지 않는다.”

7. 성례聖禮

또 하나의 중요한 은혜의 수단은 성례(sacraments)이다. 성례에 대한 교리적 진술들은 다음과 같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1, “성례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와 확인물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택들을 나타내며, 그 안에서의 우리의 유익을 확증하며; 또 교회에 속한 사람들과 나머지 세상 사람들과 사이에 유형적 차이점을 주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엄숙히 서약하게 하는 것이다.” 소요리문답 92문답,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인데, 거기에서 감각적 표들에 의해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혜택들이 표시되며 신자들에게 확인되고 적용됩니다.” 한마디로, 성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은혜언약의 거룩한 표와 확인물이다.

일반적 고찰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그 이유는 복음의 중심적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죄 씻음이 성례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성례는] 유형적(有形的) 말씀들이다.” 그 둘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 내용으로 가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적어도 성인(成人)들에게 구원에 절대필수적이지만, 성례는 그렇지 않다.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므로 모든 신자들에게 의무적이지만 구원에 절대필수적이지는 않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성례는 언약 백성들에게만 주어진다.

두 가지의 성례만

신약성경은 오직 두 가지의 성례만 가르친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이다. 이것들은 구약의 할례와 유월절 제사에서 각각 같은 영적 의미를 가졌던 규례들이다. 골로새서 2:11-12,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마태복음 26:19,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고린도전서 11:23-24,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린도전서 5:7,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천주교회에서는 일곱 가지 성례들을 말하지만, 세례와 성찬 외에 어느 것도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제정되지 않았고, 또한 신품과 혼배는 성경에 언급된 규례이지만 은혜언약의 상징인 성례에 포함될 수 없다.

성례의 효력과 집례자의 자격

성례는 바른 재료와 바른 형식과 바른 의도를 가질 때 바르게 시행된다. 세례의 경우, 바른 재료는 물이요, 바른 형식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요, 바른 의도는, 세례주는 자가 세례받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인도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과, 세례받는 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성례의 효력은 성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3, “바르게 사용된 성례들에서 혹은 그것들에 의해 표시되는 은혜는 성례들 안에 있는 어떤 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집행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도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성령의 활동과 성례 제정의 말씀에 달려 있다. 그 말씀은 그것의 사용에 대해 권위를 주는 명령과 함께, 그것들을 합당하게 받는 자들에 대한 은택의 약속을 포함한다.”

성례 집례자의 자격에 관하여는, 성례가 복음 진리의 엄숙한 유형적 제시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와 수호의 책임을 정당하게 맡은 사역자들에 의해서만 집행되어야 합당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4, “(세례와 성찬) 그 어느 것도 합법적으로 임직된 말씀의 사역자 외에 누구에 의해서도 거행될 수 없다.”

세례

세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명하시고 제정하신 성례이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그러므로 이 규례를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 5, “비록 이 규례를 멸시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것은 큰 죄이지만.”

세례의 의미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94문답, “세례는 성례인데, 이 의식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 됨과 은혜언약의 혜택들에 참여함과 또 주의 것이 된다는 우리의 약속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세례는 신자의 죄씻음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이것은 세례의 기본적인 의미이다. 사도행전 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사도행전 22:16,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에베소서 5:26,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물은 씻음 곧 죄씻음을 상징한다.

둘째로, 세례는 신자와 그리스도의 영적 연합을 상징하며 확증한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안으로,’ 에이스) 세례를 주라.” 사도행전 8:16, “주 예수의 이름으로[안으로] 세례를 받으니.” 사도행전 19:5도 같음. ‘안으로’(에이스)라는 말은 연합의 의미를 가진다.

셋째로, 세례는 신자가 은혜언약의 혜택들을 누림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은혜언약의 혜택들이란 중생, 영적 부활, 영생, 양자됨 등을 가리킨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에이스, ‘안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에이스)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에이스)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넷째로, 세례는 신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공적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유형교회의 회원이 되는 기본적 절차이다. 세례교인만 교회의 정회원이다. 마태복음 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세례의 방식

세례의 정당한 방식은 무엇인가? 교회 역사상 일반적으로 인정된 세례의 방식들은 세례받는 자의 머리에 물을 뿌리거나 붓거나 혹은 그를 물 속에 담그는 것이다.

침례교회는 침수浸水(immersion), 즉 물 속에 담그는 것만 세례의 정당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① 원어에서 ‘세례준다’는 말(밥티죠)이 ‘물에 담근다’는 의미이며, ② 물 속에 담그는 것(침수)만 세례의 근본적 의미인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세례의 방식에 대해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더욱이, 다음 네 가지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침수만을 고집하는 침례교회의 입장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본다.

첫째로, 신약성경에 ‘세례준다’는 헬라어(밥티죠)는 일차적으로 ‘물에 담그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지만 반드시 그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물에 담근다’는 뜻 외에 ‘깨끗케 한다,’ ‘씻는다’ 등의 뜻도 있다. 신약성경에서 예를 들면, 마가복음 7:4,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밥티죠,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잔과 주발과 놋그릇과 식탁들을 씻음이러라(밥티죠).” 히브리서 9:10, “여러 가지 씻는 것((밥티스모이스, washings).”

둘째로, 신약성경에서 세례의 예들은 세례가 물에 담그는 방식이었음을 증거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이것은 단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단강에 내려가셨음을 증명할 뿐이다. 사도행전 8:38-39,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또한, 오순절에 3천명이 받았던 세례(행 2:41)나 빌립보 간수의 온 가족이 밤에 받았던 세례(행 16:33)는 물에 담그는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더 적다.

덧붙여, 초대교회의 관습에서도 세례가 물에 담그는 방식만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주후 100년경의 디다케는 흐르는 물이나 다른 물에서 하는 세례뿐 아니라 또한 머리에 물을 세 번 붓는 방식에 대해 언급한다(7:3). 또 에드워드 로빈손은 말하기를, “아직 보전된 어떤 세례용 돌항아리는 너무 작아서 세례 지원자의 몸 전체를 담글 수 없다. 또 실상 매우 믿을 만하고 상당히 오래된 몇 개의 기념물들은 물을 붓는 세례들을 보여 주는데, 예컨대 콘스탄틴 황제의 세례의 경우 등이 그러하다”고 하였다.

셋째로, 세례의 의미는 반드시 물에 담그는 것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세례의 기본적 의미인 죄씻음은 물을 붓거나 뿌림으로도 충분히 표현된다. 구약성경은 피나 물을 뿌림으로 죄를 깨끗게 함을 풍부하게 증거한다. 레위기 1:5,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레위기 4:6,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나자아) 것이며.” 에스겔 36: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자라크) 너희로 정결케 하되.”

죽음과 부활은 세례에 내포된 의미이지만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과이다. 로마서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따라서 세례 자체가 반드시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나타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넷째로, 복음의 보편적 성격은 ‘물에 담그는 것만 정당하다’는 주장에 반대된다. 예컨대, 심각한 병자들, 사막 지방, 추운 지방의 경우들에 세례 대상자들을 물 속에 담그는 것은 부적합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세례 방식 즉 물을 뿌리거나 물을 붓거나 물 속에 담그는 세례 방식들이 다 정당하다고 본다. 세례에서 중요한 것은 물이라는 상징물이지 물의 양이 아니라고 본다.

세례의 대상-유아세례의 정당성

세례의 대상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세례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유아세례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침례교회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유는, ① 유아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할 수 없고, ②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명확한 명령이나 예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유아세례를 거부한 것은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再洗禮派(Ana-baptists)에게서 볼 수 있었던 입장이었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했고 신앙을 고백하며 순종하는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주고 그들만 교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비록 성경에 유아세례를 베풀라는 명확한 지시가 없지만, 우리는 유아세례가 성경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정당하다고 본다. 그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은혜언약의 동일성 때문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동일하다. 구약시대에는 그 표가 할례이며 신약시대에는 세례이다. 구약시대에 유아들은 언약 백성의 표로서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창 17:12) 모압 평지에서도 언약의 갱신 때에 참여하였다(신 29:11-12).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시 127:3).

아브라함의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신약 백성인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로마서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특히, 하나님께서는 구약 아래서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받아들이신 후 그들을 언약 공동체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신약시대에도 유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지 결코 이방인이 아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유아들은 하나님의 기업이요 선물이다. 사실,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히 나타난 시대이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둘째로, 유아들에 대한 주 예수와 사도 바울의 태도와 증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는 신자들의 유아들을 영접하셨고 그들을 천국백성으로 여기셨다. 마가복음 10:14, 16,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누가복음 18:15, “사람들이...자기 어린아기를 데리고 오매.”

또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자녀들을 거룩하다고 불렀고, 교인으로 간주하여 교훈하였다. 고린도전서 7:14, “이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음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원문 직역).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셋째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가정 구원의 약속과 가족 세례의 예들 때문이다. 사도행전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루디아와 그 집[가족들]이 다 세례를 받았고(12-15절), 빌립보 간수와 그 가족들도 다 세례를 받았다(32-34절). 이러한 말씀들은 유아세례를 지지한다.

넷째로 그리고 부수적으로이지만, 신약 교회의 역사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신약 교회의 매우 초기로부터 보편적으로 행해져왔던 전통적 의식이었다. 사도 시대에 유대교는 이방인 가정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유아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입교하게 하였다고 하며, 이러한 풍습은 하나님의 섭리로 신약 교회에 이어졌다고 보인다. 이 의식은 종교개혁 시기에 재세례파의 반대를 받기 전까지는 반대를 받은 적이 없었다.

주후 155년경 86세로 순교한 폴리갑은 자신이 86년 간 그리스도의 종이었다고 말했고, 2세기에 순교자 저스틴은 그의 당시 60세나 70세의 남녀 그리스도인들 중 “유아 때부터 그리스도의 제자이었던” 자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 2세기에 이레니우스는,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통해 중생하는 모든 연령의 사람, 즉 영아들과 유아들과 소년들과 청년들과 노인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말했다. 이러한 말들은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지지한다.

3세기에 오리겐은 “유아세례는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받은 확정된 풍습이다”라고 말하였다. 주후 253년경의 카르타고 회의는 유아세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유아들이 제8일 이전에 세례받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토의하였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처음 4세기 동안 오직 두 명의 교부들만 유아세례의 연기를 주장하였다. 터툴리안은 이방인 부모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세례에 관해 말한 것이었고, 나지안저스의 그레고리는 3살 될 때까지 연기할 것을 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다 자기들의 견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주후 5세기에 어거스틴은 “유아세례의 교리가 교회 회의들에 의해 제정되지 않았으나 전세계 교회가 보편적으로 시행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 교리는 아마 사도들의 권위로 확정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유아의 구원 문제에 관하여는 정통 교회 안에 두 가지 견해가 있다. ① 어떤 이들은 유아 시절에 죽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보았으나, ② 다른 이들은 언약의 자손들이 구원받는 것은 확실하나 그 외의 경우는 불확실하다고 보았다.

유아세례에 대한 반론들

유아세례에 대한 여러 가지 반론들이 있다. 첫 번째 반론은 신약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직접적 혹은 명백한 명령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세례에 대한 직접적 명령만 유아세례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유아세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그것을 반대할 충분한 조건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언약의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신 후 그들을 제외시키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믿는 가정에 태어난 유아들이 언약 백성의 특권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두 번째 반론은 신약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분명한 예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유아세례를 반대하거나 제외시킨 예도 없다. 신약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선교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사도들의 선교의 활동 외에는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언급된 가정 세례의 예들은 당시의 유대교의 풍습을 볼 때 유아세례를 포함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세 번째 반론은 세례의 조건은 신앙고백이며 유아는 신앙을 고백할 수 없으므로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러나 이 말씀은 성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며 유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또한 침례교인들이라 할지라도 신자의 유아들이 아직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다 구원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믿는 가정 안에 있는 이방인들이요 지옥에 갈 자들이라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본다.

네 번째 반론은 유아세례와 성인세례의 근거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두 세례의 근거는 다르지 않다. 모든 세례의 근거는 ‘은혜언약’이다. 단지, 성인들은 신앙고백을 통해 은혜언약 안에 들어오지만, 유아들은 출생을 통해 은혜언약 안에 들어온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섯 번째 반론은 유아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세례받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들을 성찬 참여에 제외시키는 것은 단지 성찬 참여에는 분별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1:27-28,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여섯 번째 반론은 유아세례 받은 자들의 생활이 해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잘못된 삶이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유아세례교인들의 생활의 해이함은 교회가 더욱 일깨우고 가르쳐야 할 문제이다. 또 유아세례를 받게 한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양육하는 일에 성실해야 한다. 즉 성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또 그들에게 경건하고 선한 인격과 삶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성찬

세례와 같이, 성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규례이다. 고린도전서 11:23-25,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원문 직역).

성찬의 의미

성찬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나타낸다.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떡은 그의 살을, 포도즙은 그의 피를 상징한다.

성찬은 또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확증한다. 소요리문답 96문답,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신앙으로 그의 몸과 피에, 또한 그의 모든 은혜들에 참여하여 영적으로 양육되고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요한복음 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성찬은 또한 신자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는 성찬식에서 표시된다. 고린도전서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성찬의 재료와 참여자

성찬의 재료에 대하여는, 초대교회는 보통 식사의 빵을 사용하였으나, 천주교회나 루터교회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무교병)을 사용하였다. 개혁교회는 초대교회의 풍습을 따라 보통 식사의 빵을 쓰며 포도즙은 발효되지 않은 것을 사용한다. 마태복음 26:29, “포도나무에서 난 것”(막 14:25; 눅 22:18).

성찬의 참여자에 대하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모든 자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짓고 회개치 않은 자나 권징 아래 있는 자는 제외된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분별할 수 있는 연령이 되기까지는 제외된다. 고린도전서 11:27-30,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여러 견해들

마태복음 26:26, 28, “이것이 내 몸이니라...이것은 나의 피니라.” 이 말씀은 문자적 의미인가, 아니면 상징적 의미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성찬에 실제로 계시는가? 성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함께하심; presence)에 대하여, 역사상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었다.

초대 교부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이것이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이해하였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다. 어거스틴은 성찬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지만 떡과 포도즙의 실체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고 보았다.

그 후, 천주교회는 떡과 포도즙의 실체가 미사 때 신부의 선언으로 그것들의 특질을 가진 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소위 ‘화체’(化體, Transubstantiation), 즉 실체의 변화를 주장하였다(화체설).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회의 화체설을 거부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화체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사제(priest, 천주교회의 신부)의 봉헌으로나 혹은 어떤 다른 방식으로든지 빵과 포도즙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한다는 (보통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라 불리는) 교리는 성경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식과 이성에도 모순되며, 그 성례의 본질을 뒤집어엎으며, 여러 가지의 미신들 즉 실로 조잡한 우상숭배들의 원인이 되어 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29:6).

종교개혁 사건 이후, 개신교회 안에는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해 세 가지의 견해가 있었다.

첫째로, 루터는 성찬의 떡과 포도즙 안에, 그것들 곁에 또 그것들 밑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함께 계신다는 소위 ‘공재’(共在, Consubstantiation), 즉 함께 있음을 주장하였다(공재설). 이것이 루터교회의 견해가 되었다. 루터교회는 이 견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편재성(遍在性), 즉 어디에나 계심과 더불어 주장하였다. 성찬 교리에 있어서, 루터는 다음에 언급할 즈빙글리의 견해를 강하게 거부하였다.

둘째로, 즈빙글리는 떡과 포도즙이 상징물 혹은 기념물에 불과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함께하신다고 생각할 것이 없다는 견해를 가졌다(상징설). 이것이 개신교회의 일부의 견해가 되었다.

셋째로, 칼빈은 성찬의 떡과 포도즙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함께 계신다는 견해를 가졌다(영적 임재설). 이것은 개혁교회의 표준적 견해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9:7, “이 성례를 받기에 합당한 자들은 그것의 유형적 재료들에 외적으로 참여할 때, 믿음에 의해 내적으로,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그러나 육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가 아니고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의 모든 은택들을 받으며 먹는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 때 그 빵과 포도즙 안에, 그것들과 함께, 혹은 그것들 아래, 육체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있지 않지만; 그 재료들 자체가 그들의 외적 감각들에 그러한 것처럼, 그 규례에서 신자들의 신앙에 따라 실제적으로 그러나 영적으로 함께 있다.”

성경은 성찬의 떡과 포도즙을 주의 몸과 피라고 불렀고 그것들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큰 죄로 간주하였다. 고린도전서 11:27, 29,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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