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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제7부. 교회론(1)-기독교교리(9)/김효성

by 싯딤 2009. 4. 25.

제7부. 교회론

교회론(Ecclesiology)은 교회와 은혜의 수단에 관한 진리들을 정리한다.

성경에서 교회론에 중요한 책들은 에베소서(교회의 본질, 속성들), 고린도전서(교회의 문제들, 성례),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유다서(이단 배격), 사도행전(교회의 사명인 전도), 고린도후서(사도직, 목사직),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목사, 장로, 집사의 자격과 임무) 등이다.

교회론의 주요 주제들

1. 교회의 본질

2. 교회의 속성

3. 참 교회의 표

4. 교회의 권세와 임무

5. 교회의 운영과 조직

6. 은혜의 수단

7. 성례

1. 교회의 본질

'교회'라는 용어

‘교회’敎會라는 말은 ‘교敎를 믿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일 것이다. ‘교회’라는 영어 처치(church)나 독일어 키르헤(kirche)는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뜻인 헬라어 퀴리아케에서 나왔다.

‘교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할과 에다는 흩어져 있든지 모여 있든지 간에 별 차이 없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한글 개역 성경이나 영어성경에서 ‘회중’ (congregation) 혹은 ‘총회’(assembly)로 번역되었다. 카할은 고센 땅에 사는 이스라엘 ‘회중’을 가리켰으며(출 12:6) 또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 아래 모여 있었던 이스라엘 ‘총회’를 가리켰다(신 5:22). 에다는 한글 성경에는 주로 ‘회중’으로 번역되었다(출 12:3).

‘교회’라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카할과 에다같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에클레시아는 ‘불러낸 무리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단순히 ‘민회’나 기타 세속적 모임을 가리키기도 하였다(행 19:39, 41).

‘성도의 교통’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무어라고 정의될 수 있으며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초대교회에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폴리갑, 순교자 저스틴 같은 교부들과 변증가들은 교회를 단순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중세시대는 교회의 외적 조직을 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교회관에서 이탈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은 다시 성경적 교회관으로 돌아가 교회를 성도들의 교통이라고 바르게 이해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며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 곳에 참 교회가 있고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떠난 외적 조직의 계승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은 성경적 교회관을 고백하였다.

벨직 신앙고백 27조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모두의 구원을 기대하고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거룩케 되고 인침을 받은 참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거룩한 회중이요 모임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 17장은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 모으신 신실한 자들의 무리이다,” “모든 성도들의 교통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무형적인 공동적 혹은 세계적 교회는 그것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진, 모여지는, 또 모여질 선택된 자들의 수 전체로 구성되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아내요 몸이요 충만이다.

복음 아래서 역시 공동적 혹은 세계적인 유형적 교회는 전에 율법 아래서와 같이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참 종교를 고백하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요 하나님의 집과 가족이니 이 교회 밖에는 구원의 일반적 가능성이 없다.

이와 같이, 개혁신학은 교회를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으로 보며, ‘성도들의 교통’ (communio sanctorum)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교통’이라는 라틴어 콤무니오는 ‘연합과 교제’를 의미한다. 교회는 건물이나 외적 조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모인 성도들의 연합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성경에 교회라는 말이 사용된 예들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제일 처음 ‘교회’라는 말이 나온 곳이다. 주께서는 교회의 건립이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계획이며 자신의 중요한 사역임을 증거하셨다. ‘내 교회’라는 말은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과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무리를 가리켰다.

사도행전 2:47,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그 교회에 더하게 하시니라”(전통사본). 이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교회’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오는 곳이다. 이 말은 특별한 뜻을 가졌다기보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과, 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받았던 3천명의 신입교인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구절은 교회가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킴을 나타낸다.

사도행전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이 구절들도 교회가 단순히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킴을 보인다.

로마서 16:5, “저의 교회[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고린도전서 16:19,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골로새서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빌레몬서 1-2, “동역자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위의 구절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가 어떤 성도의 집에서 모인 무리를 가리켰음을 보인다. 사도 시대의 교회들은 오늘날처럼 어떤 특별한 명칭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특별한 예배당도 없었다. ‘성도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가 어느 집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서로 교제하기 위해 모인 모임임을 잘 나타낸다. 초기의 교회는 어떤 조직체가 아니었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구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한다. 누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가? 예수 믿고 구원얻은 성도들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우리는 이것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부른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와 같이,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의 구성원은 구원받은 성도들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에베소서 1:4-14에 증거된 대로,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속함을 얻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연합하여 교제하는 곳에 교회가 있다.

무형교회와 유형교회

교회를 성도들의 교통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교회를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현실 교회들의 불완전함을 생각할 때 이러한 구분은 더욱 필요하다.

우선, 교회는 무형적인 면이 있다. 무형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술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 즉 이미 구원받았고 또 지금 구원받고 있고 또 장차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며 그들의 수는 충만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천국에 들어간 자들이나 장차 구원얻을 자들이나 현재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을 다 볼 수 없다. 또 우리는 현실 교회 속에서 구원받은 신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신자들을 명확히 구분할 수도 없다. 그런 점들에서 참 교회는 무형적이다.

그러나 참 교회는 또한 유형적이다. 교회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 자녀들로 구성되며 그들로 구성된 교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이다. 특히 교회는 공동적 신앙고백과 예배, 성례, 그리고 외적 조직 등에서 그 유형적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유형교회의 한 특징은 회중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포함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마태복음 13장의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세상에서의 교회의 모습을 나타낸다. 교회 속에는 종종 위선자들이나 가룟 유다 같은 이들이 섞여 있다.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의 교회의 모습에서나,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 및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과 그 이후 교회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는 많은 교리적, 윤리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고 교회답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 왔다. 이와 같이, 유형교회는 참 교회답지 않은 요소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건립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고 지금 건설 중에 있다. 에베소서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주께서 교회에 목사들과 교사들을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엡 4:12).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건립되어야 하는가? 교회는 단순히 조직체가 아니므로, 교회 건립은 단순히 외형적 건립이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교회의 건립이 단순히 예배당 건축이나 교인수의 증가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성전 건축을 명하셨듯이 신약시대에 예배당 건축을 명령하신 적이 없다. 신약 교회의 예배당은 교회의 모임을 위해 필요해서 건축하는 것뿐이다. 교인들의 숫자나 헌금 액수 등도 비록 그것들이 복음의 결실을 측정하는 요소들이 될 수 있을지라도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다.

교회 건립은 무엇보다 영적이어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엡 5:26-27). 그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복음 진리를 선포하여 결신자들을 얻고 그들을 성경 말씀으로 성실히 가르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교회 건립에 있어서는 한 명의 영혼의 구원과 그 영혼의 영적 성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인들, 즉 세례교인 혹은 입교인을 신중히 받아들여야 한다. 지교회의 목사와 당회는 교인들의 신앙고백을 성실히 확인해야 한다. 만일 지교회가 이 기본적 의무에 성실하지 않는다면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선이 흐려지고 말 것이다. 교회들의 부패는 부분적으로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이 불성실하였기 때문에 왔다. 신명기 23:2-3,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신명기 22: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또 비록 교회에 직분이나 회의 등의 조직이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교회에 본질적이지 않고 부수적일 뿐이다. 천주교회는 교황과 주교 회의를 중심한 소위 ‘가르치는 교회’의 조직을 교회의 본질로 보며, 따라서 이 조직을 떠나서는 교회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외적 조직은 본질적이지 않고 더욱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이탈된 조직은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뿐 아니라 오히려 가증스럽다.

또 교회에서 성경적, 역사적 바른 교훈의 계승은 외적 조직의 계승과 비교할 수 없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수되어 온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옛신앙을 믿고 고백하고 전파해야 한다. 교회에서 바른 교훈의 계승이 없는 단순한 조직의 계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교회 혹은 교단이 아무리 찬란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도들로부터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유산이 계승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역사와 전통은 전혀 무의미하며 참 교회의 계승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보수적 장로교회들이 평양신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마포삼열 박사나 총회신학교의 기둥과 같았던 박형룡 박사의 바른 신앙을 지키고 전수하지 못한다면, 그 전통과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교회에서 바른 신학의 교육과 전수는 생명같이 중요하다.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들의 체계적 지식이며 역사적 개혁신학은 성경적으로 바른 신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혁신학을 바르게 연구하고 파악하며 또 후대에게 성실히 가르치고 전달해야 한다.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참 교회 건립을 위해 힘써야 한다.

천주교회의 교회관

교회 역사상, 2세기 후반부터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분파들과 이단들에 대항하여 교회의 외형적 일치와 주교(主敎, 교구를 맡은 성직자)의 역할을 점점 더 강조하게 되었다. 주후 3세기, 터툴리안의 제자요 카르타고의 주교이었던 키프리안(Cyprian, 258년경에 사망)은 처음으로 감독교회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키프리안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① 주교(bishop, 감독)는 사도들의 후계자이다. ② 주교는 교회의 기초요 주인이다(마 16:18). 따라서 교인이 교회에 가입하거나 나가는 일은 주교의 결정에 맡겨져 있다. ③ 주교는 제사장이며, 그가 집행하는 예배는 제사이다. ④ 주교들의 연합체인 주교회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이다. ⑤ 주교들은 모두 동등하다. 아직 로마 주교의 우월권은 주장되지 않았다. ⑥ 주교에게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교에게 대항하는 자는 교회의 교제를 상실하고 따라서 구원을 상실한다. ⑦ 참된 교인들은 교회에게 복종하고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교회 밖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여기에 유형적 일체성에 의한 전세계적 교회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이것은 천주교회적 오류의 씨앗이다.

주후 4, 5세기, 어거스틴(Augustine, 354-430년)은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보면서도, 키프리안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의 교회관은 그의 구원관과 일치하지 않았다.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성도들의 교통이라는 생각보다 교직 제도와 같은 외적 조직을 점점 강조하였다. 이것은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교직 제도에 대한 강조는 결국 교황 제도로 발전되었다. 주교직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등 대도시 총대주교(Patriarch)의 직으로 발전되고, 주후 533년 비쟌틴 황제 유스티니안은 로마 주교의 수위성首位性을 인정하고, 607년 로마 주교 보니페이스 3세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을 ‘세계적 주교’(Universal Bishop)라고 불렀고 이것이 교황제도의 시작이었다.

천주교회의 교회관은 공식적으로는 종교개혁 이후에 작성되었으나 중세 시대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트렌트 요리문답은, 교회는 “하나의 무형적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의 유형적 머리인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의 후계자를 가진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신실한 자들의 단체”라고 정의했다. 16세기말 천주교회의 탁월한 변호자 벨라민(Bellarmine) 추기경은, 교회를 “동일한 기독교 신앙의 고백과 동일한 성례들의 사용에 의하여 연합되고, 합법적 목사들과 첫째로 지구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로마 교황의 치리 하에 있는 모든 무리들”이라고 정의했다. 이와 같이, 천주교회에 의하면, 교황을 우두머리로 한 교회의 외적 조직은 교회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천주교회는 또 ‘가르치는 교회’와 ‘듣고 배우는 교회’를 구별하며, 가르치는 교회를 더 중시하고 교회의 유일성, 보편성, 사도성, 무오성 등의 속성들을 그것에 돌린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 구원의 은혜와 복들을 나눠주신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자기들의 교회는 독점적으로 구원의 기관이며 구원의 중보자이다.

한편, 11세기에 분리되었던 헬라 정교회는 천주교회와 같이 외적 조직을 중시하나, 교황 제도를 인정치 않고 그 대신 교회의 주교단과 대회들에 무오적 권위를 둔다. 그들에 의하면, 교회적 권위의 궁극적 원천은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교회의 공통적, 불변적 마음’이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교회만 지상에서 참된 유일한 교회라고 본다.

교황 중심의 조직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보는 천주교회의 교회관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교회의 조직은 필요하며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니다. 교회는 성경이 보이는 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더욱이, 교회의 목사나 회의나 전통이 성경 교훈에서 이탈하였을 경우, 그것은 결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참 교회는 어떤 교회 지도자나 회의나 전통에 있지 않다. 참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 가운데 있다. 그 외의 것들은 교회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며, 성경의 바른 교훈에 일치할 때만 존중될 수 있고 또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적 재세례파’의 교회관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Anabaptists) 중에 ‘성경적 재세례파’라는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당시의 신령파(Spiritualists)나 이성론파와 달리, 성경의 권위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루터나 칼빈처럼 옛날의 교회들을 성경적으로 개혁하려 하지 않았고 성경에 근거하여 새로운 교회를 건립하려 하였다. 그들의 지도자들로는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펠릭스 만츠(Felix Mantz), 죠지 블러럭(George Blaurock), 미카엘 새틀러(Michael Sattler) 등이 있었다. 초기에는 천주교 신부들이 많았다.

그들의 사상은 새틀러가 작성한 “슐라이템(Schleitheim) 신앙고백”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신앙고백에 의하면, 그들은 중생을 강조하였고 순종하는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으며 유아세례를 부정하였다. 또 그들은 교회에서의 권징의 시행과 개인적으로 가증한 것들로부터의 성별과 불순종하는 형제들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하였다. 그들은 또 ‘자유교회’의 원리, 즉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였고 칼과 저항을 부정하였으며 신자의 맹세나 공무원직을 부정하였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붙는 변화된 마음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메노파(the Mennonites; 지도자-Menno Simons)나 아만파(the Amish; 지도자-J. Ammann)나 후터파(the Hutterites; 지도자-Jacob Hutter) 등이 그들의 후예들이다. 침례교회는 재세례파와 직접적 연관이 없다고 한다.

2. 교회의 속성

주후 381년의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세계적,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성경이 증거하는 교회의 세 가지 속성을 잘 드러낸다.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며 세계적이다.

하나됨(일체성, unity)

교회의 첫 번째 속성은 하나됨이다. 교회는 하나이다. 전세계에 많은 교회들과 교단들과 교파들이 있어도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 전체로 구성된 교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세계에 오직 하나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얻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한 교회에 속한다. 벨직 신앙고백 27조는 “이 교회는 세상 처음부터 있었고 세상 끝까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1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수 전체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

우선,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는 하나이다. 소위 ‘세대주의’(dispen- sationalism)는 이스라엘과 교회는 별개의 것으로 본다. 세대주의자들은 교회를 신약 시대에 비로소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교회가 인류 창조 때로부터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그 구성원과 예배 방식과 하나님의 은혜의 나타남에 있어서 교회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시대적 독특성을 가진다. 구약 교회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성막 혹은 성전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구성되었으나, 신약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나라 사람들로 구성된다. 구약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을 통해 예표되었으나, 신약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그러나 그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교회가 아니고 동질적인 한 교회이다.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가 동질적인 한 교회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첫째로, 성경은 그 교회들에게 동일한 명칭을 사용한다. 구약성경에 ‘회중’이나 ‘총회’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할과 에다는 헬라어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로 번역되었는데,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교회’로 번역된 바로 그 말이다.

둘째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원리는 모든 시대에 동일하다. 아담 이후의 모든 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만 죄씻음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비록 구약 시대에 도덕법이 강조되었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 등 의식법을 통해 밝히 증거되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셋째로, 성경에 계시된 대로 두 시대의 교인들의 신분과 특권이 같다. 마태복음 8:11,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로마서 4: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에베소서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하나됨의 성격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은 영적 측면, 교리적 측면, 유형적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영적인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엡 1:23; 고전 12:27)는 이미 영적으로 하나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비록 세상에서 그들이 나뉘어 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나뉠 수 없이 하나가 되어 있다. 이것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사실이다.

둘째로, 교회는 교리적으로 하나다. 교리는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즉 바른 교리 안에서 하나다. 디도서 1:4, “같은 믿음(코이네 피스티스 κοινὴ πίστις)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 디도에게.” 교회의 하나됨은 바른 교리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공동적인 이해와 고백을 위해 힘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7:11, 20-21에서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기도에서 성도들의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되심과 같은 종류의 하나됨이며 그것은 분명히 진리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3-6에서 성도들의 하나됨의 근거로서 성령과 소망과 주와 믿음과 세례와 하나님 등의 여섯 가지가 각각 하나임을 들었다. 이것은 성도들의 하나됨이 교리적임을 잘 증거한다.

그러므로 B. B. 워필드는 “참된 교회 일체성”이라는 글에서 “신약의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였다”고 바르게 말했고, 마틴 로이드 죤스도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의 기초라는 책에서 “진리와 교리를 떠난 일체성이란 없다”라고 바르게 말하였다.

현실적으로, 교회들은 인간의 무지와 오해로 인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에 대한 같은 이해와 신앙고백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교파가 생긴 주요 이유이지만, 적어도 복음적 개신교단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근본 교리들에 있어서 하나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교회들은 그 정도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 대한 같은 이해와 신앙고백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외적으로도 하나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분열과 파당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파당에 대해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라고 지적하였다(고전 1:13). 또 그는 에베소 교회에게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했고(엡 4:3), 갈라디아 교회에게는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육체의 죄악된 일들이라고 열거했다(갈 5:19-21). 우리는 교회의 유형적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교회의 유형적 하나됨은 교회들의 연합 예배와 동일한 신앙고백, 성도들 간의 참된 교제, 복음 전파를 위한 초교파적 협력, 및 가능한 한 순수한 동기와 건전한 방법에 의한 조직체적 연합 등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의 하나됨이 교회의 거룩함을 손상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거룩함(성결성, holiness)

교회의 두 번째 속성은 거룩함이다. 교회는 거룩하다. 에베소서 5: 26-27,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적이다.

교회의 거룩함은 법적인 면에서와 실제적인 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교회는 법적으로 이미 거룩하다. 성도들은 법적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해진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고(헤기아스메노이스 ἡgιασμένοις; 완료수동태분사)(원문 직역).” 히브리서 10:10,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ἡgιασμένοι, 완료수동태분사).” 이것이 칭의의 진리에 담긴 은혜이다.

그러나 교회는 실제적으로도 거룩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다(엡 1:22-23). 몸은 머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또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성전은 거룩하며 또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다(아가서).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순결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한마디로,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거룩한 교회이어야 한다.

교회는 우선 교리적으로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들을 교회에 위탁하셨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딤전 3:15) 이 진리를 보수保守하며 보존하고 모든 사람들 앞에 제시하고 변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교리적으로 매우 해이하고 부패되어 있다. 역사적 대교단들의 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심지어 로마 천주교회보다도 더, 복음진리에서 이탈한 이단적이고 배교적인 사상이다. R. B. 카이퍼는 말하기를, “우리 시대의 거의 모든 대교단들과 그 밖의 많은 작은 교단들이 신학적 자유주의의 침해를 받아 왔는데,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초자연적 중생이 구원의 본질임을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더욱이, 자유주의 신학은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 기존의 역사적 교회들 속에, 특히 목사 양성원인 신학교들 속에 들어와 있어서 신학생들의 사상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교회는 또한 윤리적으로도 거룩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윤리적으로도 매우 해이하고 부패되어 있다. 교권주의와 명예심으로 인한 교회들의 분열, 교인들의 세속주의적 생활과 돈 사랑, 술과 담배, 영화와 춤 등의 무절제한 허용, 특히 근래에 낙태, 동성애, 안락사 등에 대한 교회들의 허용,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에 대한 용납, 록 형식의 현대기독교음악(CCM), 세상적 방법론을 도입한 열린 예배 등이 물밀듯이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속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참된 교회들은 이러한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을 배격해야 한다.

지상의 교회는 흔히 전투하는 교회로 표현된다. 세상에 있는 교회 곧 성도들은 마귀와 악령들과 싸움을 한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이다. 에베소서 6:10-13,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선한 싸움을 마치고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승리한 교회라고 불린다. 그들은 지금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 히브리서 4:10,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브리서 12:22-23, “하늘의 예루살렘,”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교회는 땅 위에서 모든 마귀의 시험과 죄악된 세상적 풍조를 배격하고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온전하게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

세계적임(catholicity, 공동성, 보편성)

교회의 세 번째 속성은 세계적임이다. 교회는 세계적이다. 교회의 세계적 속성은 하나님의 교회가 전 세계에 퍼져 있고 각 족속,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수가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을 말한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가족이며 집이 될 것이다(엡 2:19-21). 충만한 수의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로마서 11:25-26,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라는 구절에서 ‘공회公會’(the catholic church)는 이 세계적 교회를 의미한다. 로마 천주교회가 자신을 ‘카톨릭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비록 그것이 부당한 적용이지만 이런 의미에서이다. 하나님의 참 교회는 세계적이다. 교회의 세계적인 성격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회를 생각하는 우리의 시야를 좀더 넓게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좀더 포용적이게 가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세계적 모습을 가지지는 않았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묘사하며 그것은 작은 형태로부터 세계적인 형태로 성장할 것을 암시하였다. 교회는 “적은 무리”(눅 12:32)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같이 세상에 뿌려지고 시작되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 곡식과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그물 비유 등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사람들은 중생함으로 그 나라에 들어간다(요 3:5). 마태복음 12:28,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므로 중생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그들이 또한 교회를 구성하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린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요한계시록 1:6,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그러나 세계적 교회는 장차 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취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이 미래적 단계를 소망한다. 영광의 천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초자연적 방식으로 올 것이다. 마태복음 25:34,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빌립보서 3:20, “우리의 시민권[나라]은 하늘에 있는지라.” 히브리서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베드로후서 1:10-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22:5,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우리는 교회의 세 가지 속성을 기억하며 참 교회를 건립해야 한다. 교회는 교리적, 유형적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또 교회는 교리적, 윤리적 거룩함을 힘써 지켜야 한다. 또 교회는 세계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특히, 교회는 거룩함을 위해 하나됨을 쉽게 버려서도 안 되지만, 또한 하나됨을 위해 거룩함을 쉽게 버려서도 안 된다. 교회는 하나됨과 거룩함을 둘 다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참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인내와 사랑, 특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필요한 일이다. 교회가 하나됨과 거룩함을 둘 다 지키고자 힘쓸 때, 교회는 참 교회다워질 것이다.

3. 참 교회의 표

그리스도인은 참 교회에 속하여 주님을 섬길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고, 그 순결성의 정도도 다양하여 그 중에는 비교적 순결한 교회도 있으나 심히 불순결한 교회도 있다. 교회의 순결성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 즉 참 교회를 분별할 기준은 무엇일까? 참 교회의 표는 무엇인가?

우선 분명한 것은, 참 교회의 기준이 외적인 것들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크기나 교인의 수 혹은 예배당의 규모가 참된 교회의 표는 아니다. 만일 그러한 것이 참 교회의 표라면, 세계에서 교세가 가장 큰 천주교회는 가장 참된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천주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참된 교회는 대다수가 문제를 결정하듯이 그것의 크기나 사람 수에 의해 구별되기 불능하다. 구약과 신약의 전 교회 역사는 큰 교회라는 관념을 정죄한다... 교회가 세계에서 자라서 커지고 왕성함에 따라 통상으로 배교하며 부패하여지고, 참된 교회는 흔히 육체와 세상의 표준에 따라 약하고 멸시받는 소수로 된다”라고 하였다.

세 가지 표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참 교회의 표를 3가지로 말해 왔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 둘째, 성례들의 바른 시행; 셋째, 권징의 성실한 실행. 이 중에서도 첫 번째 표가 가장 중요하다.

참된 교회의 첫 번째 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이다. 앞에서 생각한 대로, 교회의 본질은 성도들의 교통이며,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고 표현되기도 하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3:11,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또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불린다(딤전 3:15).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수호자요 전파자인 교회에게 당신의 진리를 위탁하셨다. 그러므로 참 교회는 이 진리를 보수(保守)하며 보존하고 모든 사람들 앞에 제시하고 변호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과 임무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전파는 참된 교회의 표이며, 이것은 가장 중요하다. 어떤 교회의 순결성의 정도는,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의 모든 교훈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바르게 전파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거나 왜곡시킨 교회들, 예를 들어, 천주교회,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회, 안식교회 등은 참 교회일 수 없다. 또한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들을 포용하는 교회들도 분명히 참 교회의 표를 잃어버리고 있다.

참 교회의 두 번째 표는 성례들의 바른 시행이다. 세례와 성찬의 성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유형적 표현이다.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성례들의 바른 시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고 성경적 복음 신앙을 바르게 고백하는 것과 같다. 마태복음 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전서 11:27-29,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례들을 성경적인 의도대로 바르게 시행하지 않고 미신적이게 하거나 그것들을 소홀히 취급하는 교회는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참 교회의 표를 잃어버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에 모독적이고 미신적인 미사를 고집하는 천주교회는 참 교회의 표를 저버리고 있다.

참 교회의 세 번째 표는 권징의 바른 실행이다. 권징(discipline)이라는 말은 첫째, 성도들의 생활 훈련과, 둘째, 권징을 의미한다. 성도들의 신앙은 생활과 일치해야 한다.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은 교리적, 윤리적 오류는 마땅히 책망을 받고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실한 신앙 훈련과 권징은 참된 교회의 표이며, 권징을 폐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의 표를 상실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고, 그 외에 성경은 여러 곳에서 권징에 대해 밝히 가르친다.

마태복음 18:15-18,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로마서 16:17, “너희의 교훈[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고린도전서 5:6, 11-13,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2세기의 몬타누스파, 3세기의 노바시안파, 4세기의 도나투스파 등은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에 강하게 반대하며 참 교회의 표가 교인들의 성결성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옳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경의 교훈을 넘어서는 치우친 견해들이 있었던 것 같다. 몬타누스파는 사람이 세례받은 후에 범하는 큰 죄는 순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알려진다. 노바시안파는 로마 황제 데시우스의 대박해 때에 변절했던 자들을 받지 않다가 후에 재세례를 베풀고 받았다고 한다. 또한 도나투스파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안의 박해 때에 동일한 경향을 보였고 교회의 엄격한 권징과 교인과 목사의 순결한 자격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현대교회문제

오늘날 교회들 안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들은 한마디로 이단적인 오류들인데, 이 신학이 오늘날 기독교의 대교단들과 신학교들 속에 널리 퍼져 있는 실정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① 성경의 신빙성, 신적 권위, 무오, ②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와 형벌, ③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및 동정녀 탄생, ④ 그의 기적들, ⑤ 그의 형벌적 대속, ⑥ 그의 부활의 확실성, ⑦ 그의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 사상은 명백히 사탄에게서 나온 적그리스도적 이단사상이다.

기독교는 불변적 진리들 위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참된 교회들과 성도들은 기독교의 바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1:13-14, “너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7, 10-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현대교회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 즉 교회연합운동이다. 교회연합운동은 세계의 모든 교회들의 연합을 추구한다. 교회연합운동의 문제점은,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기독교계 안에 존재하는 각종 신학 사상들을 무비판적으로 용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에 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에 깊이 물들어 있으므로, 신학적 포용주의는 곧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을 포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연합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매우 우호적이며 궁극적으로 천주교회와의 연합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회를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교회라고 증거하였고 그 때 이후 지금까지 천주교회는 그 근본적 교리들에 있어서 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이 천주교회와의 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하는 매우 배신적인 행위이다.

교회연합운동은 심지어 이방 종교들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교회연합운동의 중심적 기관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부정하며 다른 종교들을 포용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의 타종교와 이념과의 대화 분과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가 그 대표적 예이다. 아리아라자는 세계교회협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출판한 그의 책 성경과 타종교인들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였다.

참된 교회는 일체성(unity)과 성결성(purity)을 둘 다 성실히 지켜야 한다. 거룩함이 없는 연합은 참된 연합이 아니며, 연합되지 못한 거룩함은 참된 거룩이 아니다. 여기에 현실적으로 교회들의 문제와 갈등이 있다. 성결성을 빙자한 교회들의 부정당한 분열과 분파주의도 명백히 잘못이지만, 오늘날 교회들의 더 큰 문제는 잘못된 연합주의의 문제이다.

교회연합운동의 포용주의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다.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교회의 하나됨은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 더욱이, 주께서는 교회에게 바른 교리를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들과 성도들은 교회연합운동을 배격하고 거기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R. B. 카이퍼는 교회가 외적으로만 조화와 평화를 유지하고 내적으로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을 포용하는 것은 망하는 길이라고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의 있는 교리적 논쟁에서 중간 노선을 취하는 평화주의는 많은 교회를 폐허로 만들었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상은 얼마나 슬픈가? 교리적 무관심의 암은 교회의 생명력을 좀먹는다. 교회 합동을 위한 강한 요구와 교회연합운동에 과도한 치중은 이 암종을 점점 더 악화시킨다.

현대교회의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신복음주의(Neo-evangeli- calism)이다. 신복음주의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주장하지만 자유주의자들로부터의 분리 혹은 교제 단절을 반대하는 입장 즉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교회들을 포용하고 그들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입장이다. 이것은 권징을 바르게 실행하지 않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단순히 복음주의라고 자주 불린다.

자유주의는 명백히 이단이므로, 성경을 믿는 참 신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교회들을 마땅히 배격하고 그들과 분리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하고 협력하는 태도는 악에 대한 타협이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다. 로마서 16:17, “너희의 교훈을[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뿐만 아니라, 성경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는 자들과의 교제도 끊으라고 명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전해 들은 교훈]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므로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와 신복음주의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이것을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고 부른다. 즉 근본주의는 (1) 성경적 근본 교리들의 보수와 (2)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separation, 성별)라는 두 요소를 가지며, 이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성경적 분리의 원리

현대교회의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교회들은 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에 성실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는 동시에 악을 행하는 자들과의 교제의 단절 즉 분리( separation)를 가르친다.

성경은 성도들이 어떤 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분리하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이 교제치 말고 분리하라고 가르치는 대상은 네 부류의 사람들이다.

첫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불신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고린도후서 6:14-16,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여기에서 교제란 물론 교회적 교제 즉 영적 교제를 가리킨다. 불신자는 성도에게 전도의 대상이지, 영적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둘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이단자들과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16:17-18, “너희의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10-11, “누구든지 이 교훈[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교리]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기독교 역사상 천주교회는 큰 이단이다. 천주교회는 성경의 유일한 절대적 권위를 넘어서서 교황의 무오한 권위를 주장한다. 또 천주교회는 마리아의 무죄 잉태, 승천, 중보사역을 주장하고 그를 ‘중보자,’ ‘보혜사’ 등의 칭호로 부르며 그에게 기도한다. 또 천주교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명백히 부정하고 정죄한다. 또 천주교회는 미사를 그리스도의 계속적 속죄 사역이라고 주장한다. 적어도 이런 점들에서 천주교회는 명백히 비성경적 이단이다.

또 19세기에 나타난 각종 이단 종파들과, 특히 20세기에 교회들을 부패시킨 가장 심각한 이단인 자유주의 신학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분명히 이단이다. 그것은 성경의 신빙성, 신적 권위, 무오성,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와 형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처녀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대속, 그의 부활의 확실성, 그의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부정한다. 그것은 명백히 이단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이런 이단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참된 교회들은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드러난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는 자들로부터 분리하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5:11-13,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교회가 성도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다 살필 수는 없지만, 드러난 일들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적절한 권징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넷째로,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순종치 않는 형제들과도 교제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치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오늘날의 신복음주의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신복음주의자들은, 비록 복음 진리를 믿는 형제들일지라도, 고의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 있고 교회의 질서를 깨뜨리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과의 교제의 단절은 성경적 명령이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끊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첫 번째 이유는 교회의 본질 때문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성도라면 성경적 교리를 믿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이런 성격에 배치되는 요소들, 곧 불신앙, 이단, 회개치 않는 죄, 고의적인 불순종 등을 교회에서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전도활동은 겉보기에 큰 결실이 있는 것 같을지라도 그것의 잘못된 교제가 옳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구실도 용납하지 말고 그런 활동을 반대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결코 물량주의, 숫자주의, 실용주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성경주의, 진리주의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며 또 거룩해야 한다(엡 5:26-27). 교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그래야 한다. 이단은 저주받을 사상이며 멸망케 할 사상이다(갈 1:8; 벧후 2:1). 그러므로 교회는 이단이나 고의적 죄악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 비록 지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겠지만, 우리는 순결한 교회, 흠 없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뻔뻔스런 불신앙이나 고의적 불순종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이유는 악의 전염성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교리적 오류를 책망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했다(갈 5:9). 또 그는 디모데에게 이단자를 조심하라고 말하면서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했다(딤후 2:17-18). 또 그는 고린도교회가 윤리적 악을 포용한 것을 책망하면서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했다(고전 5:6). 교리적 오류이든지 윤리적 오류이든지, 죄악은 누룩처럼 또는 독한 창질처럼 교회 안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악의 전염성 때문에 교회는 악을 제거하고 악의 영향을 차단해야 한다.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윤리적 죄악을 포용하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비난할 뿐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 거룩함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 악한 자들과의 교제의단절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우선 교회 안에서 권징의 단계들, 즉 권계勸戒(권면과 책망)와 일시적 수찬 정지(성찬 참여의 일시적 금지)와 제명 출교(교회에서 내어쫓음) 등의 순서를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성경적 분리의 원리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해해온 권징의 원리와 동일하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힌 담뿐 아니라 인간들 상호 간의 막힌 담도 허무신 위대한 화해자이시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진정한 형제요 자매이겠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함께 천국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불신앙, 이단, 회개치 않는 악, 고의적인 불순종에 대한 적절한 권징과 교제 단절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5:11-13,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4,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오늘날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함으로써 16세기 종교개혁 때와 같이 배교적이게 되고 있다. 그러면 성경적 분리의 원리는 오늘날 교회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만일 지교회 혹은 지교단이 자유주의화되거나 자유주의 신학을 고의적으로 포용한다면,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그 교회의 교정과 갱신을 위해 합법적 방법을 사용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교정과 갱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예를 들어 교회의 지도층의 다수가 배교적이거나 배교를 고의적으로 포용할 때에는, 신실한 종들은 그 교회 혹은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권징은 회개치 않는 범죄자를 교회로부터 배제하는 행위이지만,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서방의 천주교회가 전체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그 교회로부터 떠나 나왔다. 그들의 분리는 정당하였다. 그들은 분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분파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패된 교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타협의 악이었다.

그러나 부득이한 상황에서, 혹은 교회적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그 속에 머무르며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고 그것과 싸우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그들은 자신의 신앙의 절개와 순수성을 지키도록 매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4-25,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요한계시록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또 오늘날 성경을 그대로 믿는 보수적 교회는 자유주의 교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하고, 또 자유주의 교회를 포용하는 복음주의 혹은 신복음주의 교회들과도 교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보수적 교회는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연합 전도집회, 연합 성찬식, 및 성서공회, 기독교 방송국, 찬송가 발행 등의 연합적 사업 혹은 활동들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과의 교제의 단절 혹은 분리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교제의 단절은 먼저 성실한 노력을 전제해야 한다. 성급한 단절과 분리는 교회의 개혁과 갱신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 또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사랑의 덕을 잃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남보다 높게 생각하는 교만이나 형제에 대한 미움은 악에 대한 타협보다 결코 작은 죄악이 아니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영적 분별력을 좀더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갈라디아서 6:1,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

4. 교회의 권세와 임무

교회의 권세

주께서는 교회에 세 가지 권세를 주셨다.

교훈권

첫째는 교훈권 즉 가르치는 권세이다. 주께서는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보수(保守)하는 권세를 주셨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권세는 교회에 계승되었다. 디모데후서 2:2,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호하고 보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그것을 변호하였다. 빌립보서 1:7,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바가 됨이라.” 디모데전서 3:15, “이 집[교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는 진리의 수호자이며 전파자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교회에 위탁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를 보수하며 보존하고 모든 사람들 앞에 제시하고 변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교회는 이 권세에 근거하여 성경을 연구하고 교리 체계 즉 신학을 정립하며 신조나 신앙고백서 등을 작성한다. 교회의 밝은 미래는 하나님의 진리를 성실히 연구하고 지키고 전파하는 데 있다.

치리권

둘째는 치리권 즉 다스리는 권세이다. 주께서는 교회에 질서를 유지하고 그 거룩함을 지키는 권세를 주셨다. 주께서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질서 있게 운영되기를 원하신다. 고린도전서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고린도전서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바르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교회는 이 권세에 근거하여 교회의 헌법과 규칙들을 제정한다.

또 주께서는 교회가 거룩함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권세를 사용하여 교리적, 윤리적 오류에 떨어진 자들에게 권징을 행사한다. 고린도전서 5:2, 13,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권징의 원리는 구약에서도 밝히 나타나 있다. 구약율법 중 재판법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사회법으로서 오늘날 세속국가에 직접 적용될 수 없으나, 그 원리는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교회는 간음하는 자들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 특히 신명기 13장은 이단자들이나 거짓된 신비주의자들을 제거하라고 가르치면서, 이단자나 거짓 신비주의자를 확인했을 경우 그를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용서 없이”(8, 9절) 죽임으로써 이스라엘 나라에서 악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다(5절). 또 어느 한 성읍이 이단이나 거짓된 신비주의에 미혹되었을 때는 그것을 확인하면 그 성읍을 다 멸하라고 하였다(12-15절).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제명 출교에 해당된다.

권징의 목적은 네 가지다. 첫째는 범죄자를 회개시키기 위함이다. 둘째는 악의 전염을 막기 위함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다. 넷째는 교회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방하기 위함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3).

권징의 방식은 세 단계다. 첫째는 권계(admonition) 즉 권면과 책망이고, 둘째는 일시적 수찬정지受餐停止 즉 성찬 참여를 일시적으로 금지함이고, 셋째는 제명 출교 즉 교회의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제하고 교회로부터 내어쫓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0:4).

권징은 매우 중요하다. 권징은 주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시행한 권징은 효력을 가진다.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또 교회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성실히 권징하지 않는다면 주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권징을 행하지 않은 교회들을 책망하셨다. 요한계시록 2:14, 20,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가 교회의 영혼이듯이, 권징은 그 힘줄의 역할을 하며, 그것을 통해 몸의 지체들은 각자 제자리를 지키며 단합한다. 그러므로, 권징을 제거하거나 그것의 회복을 방해하려 하는 모든 자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적으로 하든지 무지해서 하든지 간에, 참으로 교회의 궁극적 와해에 기여하고 있다.

마태복음 13장의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9절)는 주의 말씀은 무엇인가? 이것은 교회에서 권징을 폐하신 말씀이 아니고, 전체 교회의 완전한 정화가 심판의 날까지 보류된다는 것을 보일 뿐이다. 이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 밝히 계시된 바대로, 각 교회나 교단은 자체의 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봉사권

셋째로, 주께서는 교회에 봉사권 즉 서로를 섬기는 권세를 주셨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 안의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병자들을 위로하는 행위에서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사람들을 섬기셨다. 마태복음 4:23,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또 그는 제자들에게 섬김에 대해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20:25-28,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5:35-36, 40,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교회의 권위는 섬김의 권위이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섬기는 일에 힘썼다. 사도행전 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도행전 6:1, “매일 구제에.” 로마서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고린도후서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갈라디아서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야고보서 5:14-15,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베드로전서 4:9-10,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교회의 임무

교회의 임무는 무엇인가? 성경은 교회의 임무를 세 가지로 계시한다. 첫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요, 둘째는 그 자체를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요, 셋째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예배

교회의 첫 번째 임무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지극히 기본적인 임무이며 따라서 교회의 기본적인 임무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성도들에게서 찬송과 감사와 영광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에베소서 1:6, 12, 14, “[이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신앙의 기본적 태도이다. 예배가 성도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부수적일 뿐이다. 예배에서의 찬송이나 기도도 그러하다. 우리는 공예배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생각하기 전에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단체적 경배가 되게 해야 한다. 예배 의식은 결코 회중을 즐겁게 하거나 회중의 기호에 맞춰서는 안 된다. 설교까지도, 먼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고 회중들은 진지하게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하며, 그 다음에 회중들의 구원과 성장과 유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배의 방식에 있어서, 예배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의 이름으로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유일한 중보자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며 그에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그의 십자가 공로와 의를 의지함 없이 드려지는 예배는 다 인본주의요 윤리 종교와 행위 종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찬송하고 기도해야 한다.

예배는 또한, 주께서 요한복음 4:24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신령(혹은 심령)과 진정(혹은 진리)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주일날의 공예배가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지만, 신약시대의 예배는 어떤 장소나 어떤 시간이나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두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언제나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신약의 예배는 결코 외형적이거나 의식적인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부패된 마음은 종교를 내용이나 진심이 없이 의식화하고 형식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잘못된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

예배는 또한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려야 한다. 그것이 전통적 예배 모범의 정신이며, 그것이 성경적이다.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요즈음 일부 교회들은 교회의 전통적 모범을 깨뜨리고 예배 시간에 대형 스크린에 비쳐지는 그림들, 드라마, 무용, 세속적 음악 형식의 복음 성가와 밴드, 청바지 차림의 복장 등을 도입하는 소위 ‘열린 예배’의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질서 있고 아름답고 선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고전 14:33). 또 우리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빌 1:10).

예배의 요소들에 관해, 신약 교회의 예배는 구약시대의 제사 의식에 비해 매우 자유로우며, 찬송과 기도와 성경적 교훈과 헌금 등으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詩)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고린도전서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초대 교회는 ‘매주일 첫날’ 곧 일요일에 공적 집회를 가지기 시작했다.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빌립보서 4:18, “에바브로디도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신약시대의 예배와 구약시대의 제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약시대의 예배는 구약시대의 제사의 대치물이 아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예표한 것이고, 부수적으로 성도의 신앙생활에 대한 교훈적 의미가 있었다. 물론 신약시대에는 성도들의 삶 전체가 제사이므로 교회에서의 공적인 예배도 그런 의미에서는 제사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제사가 독특한 의미를 가졌듯이, 신약 성도들의 예배가 제사라는 독특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즉 예배만 제사라는 관념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찬송하며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을 제사라고 계시한다. 로마서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히브리서 13:15-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신약 시대에는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며, 성도의 모든 봉사의 삶이 제사이다.

건덕健德

교회의 두 번째 임무는 건덕(edification) 즉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을 영적으로 건립 혹은 양육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자기 자신을 향해 가지는 임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엡 1:23). 몸이 자라듯이 교회도 자라간다. 에베소서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또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교회는 지금 건축 중이다. 에베소서 2:21-22,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교회의 건덕 혹은 양육의 임무를 위해, 주께서는 교회에 목사들을 주셨고 어느 정도의 조직을 주셨다. 에베소서 4:11-12, “그가 목사와 교사를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임무는 특히 교회의 교훈권과 관계된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이런 임무 때문에,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교회는 이 임무를 위해 또한 기도와 교제와 봉사와 구제에도 힘쓴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요한복음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도행전 2:44-45,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 나눠주고.” 고린도후서 8:7, “너희는... 이 은혜[성도를 섬기는 일]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린도후서 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전도

교회의 세 번째 임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특별한 임무 곧 사명(mission)이다. 세계 만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최대의 임무요 사명이다. 이것이 선교(mission)다. 선교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다.

죄인들의 영혼의 구원 즉 장차 그들의 부활과 영생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38 -40,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또 그는 승천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고 부탁하셨다. 마태복음 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가복음 16:15,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누가복음 24: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러므로 교회는 그 어떤 일보다도 전도의 일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힘을 합하여 세계 복음화의 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

교회는 이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 전도자들을 주시기를 간구하고 그들을 모집하고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물질과 기도로 후원해야 한다. 마태복음 9:37-38,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에베소서 4:11, “[그가]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주셨으니.” 디도서 1:3, “이 전도는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8:3,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빌립보서 4:14-18에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물질적 후원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교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자체를 위한 영적 건립과, 세상 사람들을 위한 전도의 임무들을 잘 수행하기 위해, 우선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회정치활동은 아님

사회정치활동이 교회의 사명인가 하는 문제는 근래에 자유주의자들과 교회연합운동가들의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과 죤 스타트 같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이다. 그들은 교회가 사회정치적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책임을 느끼며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것을 ‘총체적 선교 개념’(the holistic concept of mission)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총체적 선교 개념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다. 사회 참여나 정치 참여는 그리스도인 개인이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할 일이지만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나 임무는 아니다.

사회정치활동이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님의 사명은 사회 정치 활동을 포함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사회적인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는 태도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 누가복음 12:13-14,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 즉 자신의 사명과 임무가 죄인을 구원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임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 .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물론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러나 그의 병고침은, 비록 그것이 그의 긍휼과 능력의 당연한 표현이요 그의 신성의 증거이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부수적이고 제한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병자를 고치려고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또 많은 경우 병고침은 모든 사람이 얻은 것이 아니고, 그의 주위에서 그를 믿었던 자들이 얻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자주 말씀하셨다(마 8:2-4, 10, 13; 10:21-22, 28-29).

둘째로, 초대 교회의 사명도 사회 정치 활동을 포함하지 않았다. 초대 교회는 주께로부터 사회 정치 활동에 대한 명령을 받지 않았고, 그런 일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사도들은 주 예수께 오직 전도의 명령을 받았고 그 명령에 순종했고 그 일에 힘썼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서들의 마지막 부분과 사도행전에서 분명하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 있다. 국가 위정자들에 대해, 성경은 성도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세금을 내며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딤전 2:1-2; 롬 13:1-7; 벧전 2:13-14). 교회에게는 교회의 본연의 임무가 있고 교회는 그 임무에 충실해야 하며 국가의 일들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사회 정치 문제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5의 진술은 적절하다.

대회들과 협의회들은 교회적인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다루거나 결정해서는 안 되며; 비상한 경우들에 겸비한 청원의 방식으로나; 국가 위정자들로부터 요구된 경우에 양심의 만족을 위해 충고의 방식으로 외에는, 국가와 관계되는 세속적 사건들에 간섭할 것이 아니다.

사회 개선이나 정치 개혁의 일들은 필요하고 선한 일들이지만, 그것들은 교회가 직접적으로 관여할 일들이 아니고, 그리스도인 개인이 그의 직업에서와 그의 시민으로서의 의무 수행에서 성실히 노력해야 할 일들이다. 즉 사회 참여나 정치 참여는 성도 개인의 일이지, 성도들의 모임인 단체로서의 교회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목회자 양성원인 신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지만, 일반 유치원이나 중고등학교나 일반 대학교를 직접 설립하고 경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교회가 병원이나 고아원이나 양노원 등을 직접 설립하고 경영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교회는 일반교육사업이나 자선사업을 하는 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교회가 교양강좌나 음악이나 미술 등의 문화적, 예술적 활동들을 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그런 것은 성도 개인의 일은 될 수 있어도, 교회의 임무나 사명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적 차원에서 이런 일들을 하려 한다 할지라도, 교회는 그런 일에 직접 관계하지 말고 그런 방면에 재능과 사명을 가진 교인들로 이사회를 구성하여 행하게 해야 할 것이며, 교회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일반적 원리로 그런 일들을 측면적으로 지원하고 지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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