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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제5부. 기독론-기독교교리(6)/김효성

by 싯딤 2009. 4. 25.

제5부. 기독론

기독론(Anthropology)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관한 진리들을 정리한다.

기독론의 주요 주제들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3. 예수 그리스도의 일인격성

4.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5.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6.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

7.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 인물이시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기독교 복음의 중심 내용이시다. 로마서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전도의 중심 내용이시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린도전서 2:1, 2,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로 증거했다(요 1:14).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요 1:1)을, ‘육신’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결합된 신비를 잘 증거한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가 인간의 본질 즉 인성을 취하셨다. 초대 교회의 정통적 신조들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진리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나님이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참사람이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 혹은 한 분이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주는 신적 구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필요성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왜 사람이셔야 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범죄했으므로 사람이 죽어야 마땅하였다. 더욱이, 그는 죄 없는 사람이셔야 하였다. 만일 그가 죄가 있으셨다면, 그는 자신의 죄값으로 죽으셔야 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시려면 그는 당연히 죄 없는 사람이셔야 하였다.

성경은 과연 그가 죄가 없으셨고 택자들의 죄를 짊어지신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고 증거한다. 히브리서 4:15,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탄생하심과 관계된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자는 거룩한 자요.” 만일 그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출생하셨다면, 그가 아담에게서 전가되고 유전되어 내려오는 원죄로부터 제외되신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부수적으로 그는 사람으로 오셔서 마귀의 권세를 폐하셨다. 히브리서 2:14,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그가 사람의 연약성을 체험하셨기 때문에 그는 연약한 우리를 동정하시고 도우실 만한 구주이시다. 히브리서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필요성

그러면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왜 하나님이셔야 했는가? 구주가 단순히 사람이시면 안 되는가? 그것은 그가 죄 없는 대속 제물로서 속죄 사역을 완수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그러나 사람이 되신 그는 우리와 똑같이 죄의 유혹과 시험을 받으셨으나, 그의 신성의 도움으로 그는 범죄치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실 수 있었다. 그의 인성이 범죄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문제는 변론의 여지가 있을지라도, 그 자신이 범죄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신성을 소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신성은 그의 속죄 사역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가치가 있는 사역이 되게 하셨다. 신적 인격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인류 전체의 가치보다,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의 가치를 합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여기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죄, 곧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실 수 있었는가 하는 이치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택하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또한 그의 속죄 사역을 택자들에게 실제로 적용하는데도 필요하였다. 다시 사신 예수께서는 지금 그의 영 곧 성령을 보내심으로 죄인들을 죄에서 실제로 불러내시고 실제로 구원하신다. 즉 신적인 구주께서는 죄인들의 ‘실제적’ 구주이신 것이다. 그는 피흘려 사신 백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시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 40).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신성 또는 인성이라는 말에서 성(性, nature)이라는 말은 ‘속성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들의 총체이며, 인성은 사람의 속성들의 총체이다. ‘본질’이라는 말이 그 개념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신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인성은 사람의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성경은 예수께서 참하나님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우리는 성경의 충만한 증거들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다음 4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첫째로, 신적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는 매우 자주 ‘주’라는 명칭으로 불리우신다. 신약성경에서 ‘주’라는 명칭이 예수님께 약 667회 사용되었다. 신약의 ‘주’라는 명칭(퀴리오스 κύριος)은 구약의 ‘여호와’라는 명칭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우주와 인간의 참주인이시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명칭이다. 고린도전서 2:8, “영광의 주.” 로마서 10:9,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빌립보서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그는 또한 빈번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우신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약에서 예수께 125회 가량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존칭어가 아니고, 신성을 가진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4: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복음 11:27,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마태복음 14:33,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하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14, “아버지의 독생자.”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17-18에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함을 주장했다고 이해하였다.

그는 특히 ‘하나님’으로 불리우셨다. 요한복음 1:1,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요한일서 5:20, “그는 참하나님이시요.” 이사야 9:6,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디도서 2:13,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 외에도, 요한복음 20:28; 로마서 9:5을 참고할 수 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를 ‘하나님,’ ‘참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히 오류요 가장 심각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참하나님이심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둘째로, 신적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항상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승천하신 예수께서 땅 위의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은 피조물의 속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이다. 피조물은 장소의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영원하심에 대해 증거하였고 또 예수께서도 자신의 영원하심을 증거하셨다. 이사야 9:6, “영존하시는 아버지.” 미가 5:2,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창세 전’은 영원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이 표현은 그의 영원하심을 증거한다.

또 그는 신적 지식을 가지셨다. 마태복음 9:4, “예수께서 그 생각「자신을 참람하다고 판단하는 생각」을 아시고.” 요한복음 2:24, 25,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마태복음 17:27,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요.” 예수님의 지식은 초인간적이요 신적이다.

또 그는 신적 능력을 가지신 자로 증거되었다. 요한복음 10:37, 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이와 같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가지고 계심을 밝히 증거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2:9은 이 사실을 요약하여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고 표현하였다.

셋째로, 신적 사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일에 관여하신 자 곧 창조자로 증거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다 그로 말미암고.” 창조는 피조물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 성경은 예수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천지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자로 증거한다. 히브리서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것도 피조물의 사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역이다.

또한 그는 신적 권위를 가지신 자로 말씀하시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5:22,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특히 그는 땅 위에 계실 때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문둥병, 중풍병, 열병, 혈루병 등에 걸린 자들,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등) 죽은 자들을 살리셨고(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나사로) 떡 기적들을 행하셨고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다. 요한복음 10:37, 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예수께서는 또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들을 죄에서 자유케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2:5, 7, 10,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유대인들이 말하되)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히브리서 1:3,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요한복음 8:36, “아들이 너희를 「죄에서」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또 그는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 외에 인간에게 참안식을 줄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는가? 피조물 중에는 없다.

또 그는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요한복음 14:13, 14,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의 응답은 피조물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일이다.

또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요한복음 16:7, “내가 그를[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하나님의 영을 보내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마지막 날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5: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디모데후서 4:1,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넷째로, 신적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란히 언급되심으로 신적 영광을 받으신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신적 영광을 선포하셨다. 마태복음 12:6,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한다고 그를 돌로 치려 하였다(요 10:31-33).

그는 아버지와 함께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자시다. 빌립보서 2:10, 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특히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께 아버지와 동등한 영광을 돌린다. 요한계시록 5:12, 13,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이와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명칭들,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사역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림으로써 예수께서 참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알고 확신하자. 신적 구주께서 벌레와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아,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이 사실과 이 은혜를 깨닫는 자마다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를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는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고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참하나님이심을 증거할 뿐 아니라, 그가 참사람이심을 또한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사람이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다음 3가지 점에서 증명된다.

첫째로, 인적 명칭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구약성경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그를 “여자의 후손”(창 3:15), “아브라함의 씨”(창 22:18), “한 아기”(사 9:6), “이새의 줄기”(사 11:1) 등으로 불렀다. 그것들은 다 그가 사람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고 자주 부르셨다. 이 명칭은 복음서들에 약 84회 나오는데 일차적으로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한다. 또 성경은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직접 표현하기도 한다. 디모데전서 2:5,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로마서 5:15,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15:21,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둘째로, 인적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우선,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출생하셨다. 그는 어린 아기로 출생하셨고 그 지혜와 키가 자라셨다(눅 2:40, 52). 또 그는 몸의 연약하심도 보이셨다. 그는 40일 금식하셨을 때 주리셨고(마 4:2; 21;18) 갈릴리 호수를 지날 때 배에서 주무셨고(마 8:24) 길을 걸으실 때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으셨고(요 4:6)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셨을 때 목마르셨다(요 19:28).

또 그는 영과 몸을 가지고 계시다고 증거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여기의 ‘육신’이라는 헬라어(사르크스 σάρξ)는 ‘인간 본질 즉 인성’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2:14,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누가복음 23:46, “아버지여, 내 영혼[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을 때 피와 물을 흘리셨다(요 19:34).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손과 발을 보이셨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눅 24:39-43).

또 그는 지식의 제한을 보이셨다.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가복음 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마가복음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셋째로, 인적 행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예를 들어, 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 4:1). 히브리서 4:15은 증거하기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자주 기도하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누가복음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마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누가복음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히브리서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3. 예수 그리스도의 일인격성一人格性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한 인격, 즉 한 분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답,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성, nature)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인격(person)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행동 주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정의知情意의 특질 자체는 인격에 속한다기보다 성(nature)에 속한다고 본다.

일인격성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몇 가지 점에서 증거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항상 단수 인칭대명사가 사용된다. 즉 성경에서 그를 위하여 ‘나는, 나의, 나를, 당신은, 당신의, 당신을, 그는, 그의, 그를’ 등의 단수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지, ‘우리는, 우리의, 우리를, 당신들은, 당신들의, 당신들을,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등의 복수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

둘째로,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어떤 인격적 구별이나 교제의 증거가 없다.

셋째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다 한 분 예수께 돌려진다. 로마서 1:3, 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인성]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신성]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넷째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속성과 사역이 인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가 있고, 또 반대로 그의 인적 속성과 사역이 신적 명칭에 돌려지는 경우도 있다. 마가복음 2:10,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 고린도전서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한 인격' 안에서의 2성 연합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신적 인격이셨고, 신적 인격이신 그가 인성(人性) 혹은 인적 본질을 취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로고스 λόgος)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격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독립적 인격이 아니시고, 신적 인격이신 말씀과 결합함으로 그 인격 안에서 인격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비인격’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신적 인격과 결합하자마자 인격이 되셨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초대 교회의 레온티우스와 다메섹의 요한 같은 이들은 ‘내(內)인격’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적 인격 내에서 인격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정의는 성(nature; 본질)에 속한 특질이라고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의지뿐 아니라 인적 의지도 가지고 계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적 의지와 그의 인적 의지는 조화를 이루셨고 그의 인적 의지는 그의 신적 의지에 항상 복종하신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후 680년, 제3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이러한 내용을 진술하였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신인적(神人的, theanthropic) 인격, 즉 신인(神人, God-man)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1문답]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성)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2성 연합의 결과-삼중적三重的 전달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연합된 결과, 삼중적 전달이 있다. 첫째는 속성의 전달이다. 예수께서는 신적 속성과 인적 속성을 함께 갖고 계시지만, 그것들은 한 인격에게 전달된다. 마가복음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요한복음 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전통본문) 인자 외에는.” 로마서 1:3, 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둘째는 사역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사역들과 인적 사역들은 다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신인적성격을 가진다. 마가복음 2:10,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요한복음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고린도전서 2:8,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셋째는 은혜의 전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은혜와 영광은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존귀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찬송과 경배를 받으신다.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사도행전 7:59,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요한계시록 5:12,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여러 가지의 오해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여러 가지의 오해들이 있었다.

에비온파(Ebionites)와 알로기파(Alogi)

에비온파와 알로기파는,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그가 세례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내려오셔서 그에게 메시야 의식을 주셨으나,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떠나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요 1:14)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14은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증거한다.

도케테파(Docetism)

도케테파 혹은 가현설假現說은 그노시스주의자들(Gnostics), 게린더스(100년경), 말시온, 사벨리우스파 등의 생각으로서, 위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의 입장에서,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단순히 사람이었고 신적 그리스도께서 그의 세례 받을 때 내려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그를 떠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환영(幻影, phantasm)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도 역시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참사람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분명히 증거하고(요 1:14)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했다(요일 4:2, 3; 요이 7).

아리우스파(Arianism)

아리우스(250-336년경)는 육신이 되신 ‘말씀’(요 1:14)이 하나님이 아니시며 사람보다 나은 첫 피조물, 즉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주장하였다. 초대 교부 오리겐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시며 영원 전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본질이 하나님 아버지께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는데, 아리우스는 오리겐의 이런 견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결국,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하나님’(요일 5:20)이시요 ‘크신 하나님’(딛 2:13)이라고 증거했다.

아리우스는 아다나시우스의 반박을 받았다. 아다나시우스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심을 주장했다. 주후 321년 니케야에서의 세계 종교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라(호모우시오스)는 사상을 바른 견해로 선언하였다. 성경이 풍성히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 외의 혹은 그 이하의 어떤 말로 표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반아리우스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비슷한 본질이시라(호모이우시오스)고 주장했다. 비록 호모이우시오스라는 말이 호모우시오스와 이 ι자 하나만 다른 말이지만, 그러나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표현하지 못한다. 즉 반(半)아리우스파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는 기본적 진리이다.

아폴리내리우스파(Apollinarianism)

아폴리내리우스(310-390년경)는, 사람이 영과 혼과 몸의 3실체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신적인 ‘말씀’이 사람의 영의 자리에 들어오셨고 단지 사람의 본질 중 혼과 몸만을 취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심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경은 예수께서 참사람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451년경 사망)는, 신적 ‘말씀’이 인성과 한 인격체로 유기적 결합을 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 속에 거하셨다고 주장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비록 정도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그리스도인들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심과 비슷하였다는 말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두 인격 곧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또 참된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심을 밝히 증거한다.

유티커스파(Eutychianism)

유티커스(378-454년경)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혼합된 제3의 본질 혹은 성(性)이 되셨으며, 이 때 인성이 신성에 압도되지만 동시에 신성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 견해는 ‘일성설’(一性說, monophysitism)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일의설一意說 (Monothelitism)

일의설은, 일성설一性說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지만 가지고 계신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주후 680년 제3 콘스탄티노플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별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의지는 성(nature)에 속하므로 그가 또 신적 의지와 인적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고 선언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질(신성과 인성)과 두 의지를 고백한 것이었다.

양자설養子說

비잔티움의 데오도터스(주후 2세기)는,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난 사람이며 세례 받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받으셨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업적들에 대한 상급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후, 스페인의 감독 펠릭스(818년 사망)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에 있어서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도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요, 두 아들을 말함으로써 두 인격을 말할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속성 전달설

다메섹의 요한(675-745년경)이나 루터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속성들(전지, 전능, 편재 등)이 인성에 전달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가져오는 일성론적 오류이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는 신성과 인성의 구별이 있다.

인성 중심의 기독론

칸트(1724-180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상적인 윤리적 완전을 실현하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신앙은 무의미하고, 그의 도덕적 교훈을 따르는 것이 구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헤겔(1770-1831)은, 인류 역사가 절대자의 자기 전개의 과정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과정의 절정이며,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됨을 나타내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범신론적 사상에 불과하다.

슐라이엘마허(1768-1834)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끊임 없는, 완전한 연합 의식을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완전히 거하셨고,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예수께서 무죄 완전한 인격으로 이상적 인간성을 충분히 실현하셨다고 보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릿츨(1822-89)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이셨으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시고 그것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셨고, 예수님의 선재(先在), 성육신, 신성과 인성의 연합 등의 교리들은 종교적으로 무가치하며 신앙에 방해거리가 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도덕주의에 불과하다.

게노시스설(Kenoticism)

19세기 어떤 루터파 학자들이 주장한 게노시스설은 빌립보서 2:7의 “자기를 비어(에케노세 ἐκένωσε)”라는 말씀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왔다. 이 견해의 주장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신적 속성들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하셨으나,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그 모든 속성들을 회복하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충돌된다(말 3:6; 약 1:17). 또한 이 세상에서 생활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빌립보서의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을 때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추시고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포기하심으로써 마치 신성이 없으신 자처럼 행동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점진적 성육신설

I. A. 도르너(1885)는, 게노시스설에 반대하여 성육신을 순간적 사건이 아니고 점진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씀’(로고스)께서 인성의 수용성의 성장에 따라 점점 더 많이 인성과 연합되셨고, 그 연합이 부활 때에 완성되었고,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의식과 한 의지를 가지신 신인神人이 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성육신을 부정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성경적인 바른 개념 혹은 사상은 역사적 신조들에 잘 진술되어 있다.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주후 381년), “... 또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빛에서 나신 빛, 참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고, 그를 통해 만물이 있게 되었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처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장사되셨고 제3일에 성경대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칼케톤 신조(주후 451년),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선조들을 따라 모든 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니, 그는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이성적 영혼과 몸을 가진 사람이시고;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호모우시온),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한 본질이시고(호모우시온 );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하시되 죄는 없으시고; 신성에 의하면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에 의하면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서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2성에 있어서 혼동 없이(아슁퀴토스 άσυgcύτως), 변화 없이(아트렙토스 άτρέπτως), 분할 없이(아디아이레토스 άδiaiρέτως), 분리 없이(아코리스토스 άcωρίστως) 인정되실 유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이시고; 성들의 구별은 그 연합에 의해 결코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한 실존(위, 位) 안에서 동시에 발생하므로 두 인격들로 나누이거나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신 아들이시요, 독생자, 말씀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처음부터 선지자들이 그에 대해 선언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거룩한 선조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달해준 대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2,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영원하신 참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와 동등하신데 때가 차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의 본질을 받아 잉태되심으로 그 모든 근본적 특성들과 공통적 연약성들을 가진, 그러나 죄는 없는, 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두 개의 전체적, 완전한, 구별된 본질들 즉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었다. 그 분은 참하나님이시요 참사람이시며 그러나 한 그리스도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답,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두 구별된 본질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인격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이상의 신조적 진술들의 요지는 ① 그의 참된 신성, ② 그의 참된 인성, ③ 그의 일인격성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참하나님이시며 또한 참사람이시다. 그러나 그는 한 인격이시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주와 중보자는 이와 같이 놀라운 신인적인격이시다. 그는 놀라운 구주이시며 능력의 주이시다.

4.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 진리의 한 주제는 그의 생애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의 낮아지심과 그의 높아지심으로 정리될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인격이신 영광스러운 선재(先在) 상태에서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셨고 율법에 복종하셨고 많은 고난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 못박혀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다.

그러나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장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영광스런 상태에 계셨으나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의 낮아지심은 사람으로 탄생하심부터 율법을 지키심, 고난당하심과 죽으심, 및 무덤에 묻히심을 포함한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형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존재하셨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획득물, 상급)로 생각지 않으셨으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선재先在하심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탄생하시기 전부터 존재하셨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다. 미가 5:2, “그의 근본은 태초에, 상고에니라.”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8:58,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태초부터 계신 그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계셨더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탄생하심

본래 신적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때가 되어 사람으로 탄생하셨다.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약 시대에도 암시되었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때때로 사람의 모습 혹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암시로 이해된다. 창세기 17: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창세기 18:1, 2,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창세기 35: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또한 구약에는 신적 메시야의 탄생이 예언되어 있다. 이사야 7:14,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뿐만아니라, 구약의 성막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했다(출 25-40). 성막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증거한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밝히 증거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요한복음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존재하고 계셨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상급)로 생각지 않으셨으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디모데전서 3:16, “그는(‘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다.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 신약의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독특한 탄생의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

마태복음 1:18-25, ① 18절,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② 19절, “그 남편 요셉은...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③ 20절,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④ 22, 23절,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⑤ 25절,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누가복음 1:26-38, ① 27절,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② 34절,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③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④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에 대해 직접 증거하지는 않지만, 그의 탄생의 독특성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요한복음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 요한복음 8:23,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처녀 마리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기독교의 초자연성을 증거하는 중요성을 가진다. 오늘날 기독교회에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하는 사두개파적 사상이다. 자유주의적 불신앙이 기독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오늘날,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의 사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는 믿음의 시금석이 된다. 뿐만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처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신성을 확증한다. 예수께서 요셉과 마리아의 정상적 부부 관계에서 출생하셨다면,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더욱 증거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그가 처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고 탄생하셨으므로 그의 신성과 인성은 가장 적절하게 증거되었다. 성경도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율법을 지키심

사람으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율법을 다 지키셨다. 율법을 내신 하나님 자신이신 그가 친히 율법에 복종하셨다. 그래서 그는 나신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순종하셨다. 누가복음 2:21,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누가복음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부모님과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또 그는 공적 전도의 일을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누가복음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께서 율법을 다 지키신 것은 우리의 의를 이루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건져내시기 위함이었다. 마태복음 3:15,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갈라디아서 4:4, 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고난의 생애이었다. 신적 인격이신 그가 사람이 되신 것 자체가 큰 고난이셨다. 또한 그는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거절과 배척을 당하시고 많은 비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특히 그의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심은 그의 고난의 절정이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7문답, “땅 위에 사신 모든 시간에, 그러나 특별히 그 생애의 끝에, 그는 영육으로 전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다.”

예수께서는 신성으로가 아니고, 인성으로 죽으셨다. 즉 그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니고 사람으로서 죽으신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신성과 그의 인성이 분리될 수 없고 항상 연합되어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십가가 위에서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고난, 즉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하나님의 극심한 진노를 경험하셨다. 마태복음 27:46,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서방 교회의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극심한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음부에 내려 가시사’라는 말은 왜 첨가되었는가? (그것은) 가장 큰 시험 중에서도 나로 하여금 나의 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와 그 전에 그의 영혼으로 당하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과 공포로 말미암아 나를 지옥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구속하셨음을 확신하게 하기 위함이다”고 진술하였다(44문답). 또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도, “그리스도의 죽음 후의 낮아지심은 장사되심과 죽은 상태에 머무심과 제3일까지 죽음의 권세 아래 있으심인데, 그것은 다른 말로 ‘지옥에 내려가시사’라고 표현된다”고 진술하였다(50문답).

천주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구약 성도들의 영혼들이 머문 곳인 ‘선조 림보’에 내려가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명확한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루터교회는 그가 음부에 내려가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해석하지만, 그것도 성경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그들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베드로전서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는 말씀에서 ‘영으로’라는 말은 문맥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영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신성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 또 ‘전파하시니라’는 원어는 ‘가셔서 전파하셨느니라’라는 말로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파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무덤에 묻히심

예수 그리스도는 마침내 무덤에 묻히셨다. 무덤은 범죄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려가는 곳이다. 그곳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감옥과 같다. 고린도전서 15:3,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은 그가 참으로 죽으셨음을 증거하는 동시에, 또한 영광의 주께서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곳까지 내려가셨음을 보인다. 무덤은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서 가지는 인간의 불행의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존귀하게 보이는 인간의 몸은 거기에 묻혀 썩으며 냄새가 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바로 그곳에까지 묻히셨던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높임을 받으셨다. 빌립보서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부활하심

부활이란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단순히 정신적인 사건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 상하셨고 무덤에 묻히셨던 바로 그 몸의 부활이었다. 그의 부활은 그의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의 몸은 단순히 회생(回生)하신 것이 아니고 영광스럽게 변화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에 확실히 증거되어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네 권의 복음서들에 확실히 증거되어 있다. 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0장, 21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천사들의 증거(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② 여자들의 빈 무덤 확인. ③ 베드로와 요한의 빈 무덤 확인(눅 24장, 요 20장). ④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막 16장, 요 20장). ⑤ 여자들에게 나타나심(마 28장). ⑥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막 16장, 눅 24장). ⑦ 베드로에게 나타나심(눅 24장). ⑧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막 16장, 눅 24장, 요 20장). ⑨ 또 나타나심(요 20장). ⑩ 갈릴리에서 또 나타나심(요 21장, cf. 마 28장).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도행전에 확실히 증거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렇게 증거했다. 사도행전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는 전도할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밝히 증거했다. 사도행전 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3:14, 15,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행전 5:30-32,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사도행전 10:39-41,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 바울도 전도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밝히 증거했다. 사도행전 13:30, 31, “. . .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 서신들에도 밝히 증거되어 있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고린도전서 15:3, 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특별히, 고린도전서 15:5-8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① 게바, ② 12제자들, ③ 500여 형제들, ④ 야고보, ⑤ 모든 사도들, ⑥ 바울 자신. 고린도전서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추가적 증거들도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공적으로 자신의 부활을 친히 예언하셨다. 마태복음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태복음 17:22, 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마태복음 20:17- 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3일에 살아나리라.” 누가복음 24:5-9, “. . .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 . . .” 마태복음 27:63, “. .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은 그의 부활을 전제하며 증거한다. 그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가 하늘로 올리우신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부활과 승천은 연결되어 있다. 덧붙여, 그의 재림의 약속도 그의 부활을 증거한다. 그의 재림도 그의 부활, 그의 승천과 연결되어 있다. 그의 부활과 그의 승천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의 재림은 무의미하게 되고 만다. 그는 다시 사셔서 하늘로 올리우셨기 때문에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속죄 사역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한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선언]되셨으니.”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부활 즉 중생을 상징하며 몸의 부활을 확증한다. 베드로전서 1: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실제로 이루시는 과정이었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잘못된 설명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잘못된 설명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첫째로, 어떤 이는 예수가 기절했다가 회생(回生)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렸다고 증거하고 있다(요 19:34-35). 부상자가 무덤문을 열 기력이 있었겠는가? 더욱이 예수의 제자들이 그 연약한 부상자를 생명의 주로 전파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예수님은 그 후 어디로 가셨는가?

둘째로, 어떤 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내어 숨겨두고 거짓말로 부활을 전파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군병들에 의하여 유대 사회에 널리 퍼뜨려진 소문이기도 하였다(마 28:11- 15). 그러나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런 염려를 하였기 때문에 군병들을 동원해 무덤을 굳게 지켰었다(마 27:62-66). 또한 성경은 무덤 안에 세마포와 수건이 있었다고 증거한다(눅 24: 12; 요 20:6, 7). 뿐만아니라, 만일 수비하던 군인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쳤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더욱이, 그의 제자들은 부활을 증거하다가 핍박과 순교를 당했는데, 그들이 자기들이 지어낸 거짓말을 위해 핍박과 순교도 당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셋째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그의 제자들의 환상이나 착각에 불과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의 유력한 증거로 ‘빈 무덤’을 제시한다. ‘빈 무덤’은 환상이나 착각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생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환상이나 착각이 일어나겠는가?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들 500여 명이 동시에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전 15:6).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동일한 환상이나 착각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덧붙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증인들로 자처하였다. 진실한 증인들이 환상이나 착각을 부활의 ‘사건’으로 증거할 수 있겠는가?

넷째로,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myth)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장사되신 지 제3일에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그의 무덤이 비어 있었음을 증거한다. 빈 무덤에 대한 증거들은 단순히 신화로 설명되기 어렵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증거를 위해 핍박을 받았고 순교도 당하였다. 그들의 증거의 진실성은 모든 종류의 의심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다.

승천昇天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지 40일 후에 하늘로 올리우셨다. 승천은 성경에 밝히 증거된 사실이며 진리이다. 구약 시대의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모형적 예시(豫示)이었다(창 5:24; 히 11:5; 왕하 2:11). 또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승천(昇天)을 여러 번 언급하셨다. 요한복음 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한복음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승천을 밝히 증거하였다. 누가복음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누가복음 24:51,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사도행전 1:1-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사도행전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에베소서 4:8-10, “. . .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디모데전서 3:16,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히브리서 4:14,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라.”

승천의 성격에 관하여,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사건임을 증거한다. 사도행전 1:9,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분명히 땅에서 하늘로 올리우신 장소적 이동의 사건이었다. 루터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단순히 장소적 이동으로보다 상태의 변화로 본다. 즉 승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화되어 온 세상에 편재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단순히 장소적 이동으로 증거한다. 그것은 구약 시대의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과 같다. 더욱이, 인성의 신성화는 진리의 일반적 원리들을 어긴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온 세상에 편재하시지만, 그의 인성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신 후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고 신인동형주의적(神人同形主義的), 즉 비유적 표현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증거한다. 시편 110:1,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에베소서 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히브리서 1:3,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8:1, “이제 한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브리서 10:12,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브리서 12:2,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와 영광을 받으시며 또한 교회와 우주에 왕권을 행사하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선지자와 제사장의 일을 계속하실 뿐만 아니라, 특히 왕으로서 일하신다. 즉 그는 그의 영 즉 성령을 통하여 선지자의 사역을 계속하시고, 또 대제사장으로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 자기 백성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시며, 특히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세우시고 다스리고 보호하시는 것이다.

재림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종말에 하늘의 영광의 처소로부터 이 땅에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것이 성도의 소망인 주의 재림이다. 사도신경,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주의 재림은 확실하게 이루어질 사건이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30,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한복음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사도들도 주의 재림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매장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거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친히 외치는 소리와 천사장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눈으로 볼 수 있게, 영광스럽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사도행전 1:11,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24:36-39, 42-4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 .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6.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죄인의 구원이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주’라는 명칭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고 질문할 때, 그의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그것을 잘 나타낸다.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에게 해당하는 명칭이었는데, 구약 시대의 이 세 직분은 장차 오실 한 인물을 예표하였다. 그는 참선지자, 참제사장, 참왕으로 오실 자이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나타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선지자, 참제사장, 참왕이시다.

선지자직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선지자이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뜻, 특히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실 때 친히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다 가르치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 일을 계속하신다. 소요리문답 24문답,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써 선지자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의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사도 베드로는 모세의 이 말씀을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하며 인용하였다(행 3:22, 23).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밝히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치신 말씀들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 전달하였다. 그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표현하기도 하셨다. 누가복음 13:33, “. . .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또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임을 강조하셨다. 요한복음 8:26, 28,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12:49, 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요한복음 15:15,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제사장직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제사장이시다. 제사장은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로서 그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와 기도를 드리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소요리문답 25문답,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사역을 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많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제사장이 되시고 제사장의 일을 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모습]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스가랴 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자기 보좌에서 제사장이 되리니].” 이사야 53:10, 12,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속죄의 제사를 올리셨음을 밝히 증거한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 유화宥和제물)로 세우셨으니.” 에베소서 5:2,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프로스포라 προσφορά)과 생축(뒤시아 θυσία)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힐라스모스, 유화제물)이니.”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부르고(히 5:6; 7:15, 17, 21; 10:21) 또 더 빈번히 ‘대제사장’으로 부른다(히 2:17; 3:1; 4:14; 5:10; 6:20; 7:26; 8:1; 9:11). 또한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제사 혹은 제물이라고 증거한다. 히브리서 9:26, “자기를 단번에 제사(뒤시아 θυσία)로 드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프로스포라 προσφορά, 몸의 예물)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신다.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엔튕카네이, 탄원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25, “그는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요한일서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왕직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왕이시다. 왕은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를 다스리시고 보호하신다. 소요리문답 26문답,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 자신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우리를 보호하심으로써, 그리고 그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제압하시고 정복하심으로써 왕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많다. 구약성경은 장차 한 왕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예언된 그가 오셨는데,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민수기 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사무엘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사야 9:6, 7, “(그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시편 110:1, 2, 5,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 . .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다니엘 7:13, 14,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 . .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미가 5:2,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스가랴 9:9, “시온 딸아 크게 기뻐하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 곧 주(主)가 되심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1:32, 33,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 마태복음 27:11,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요한복음 18:37,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에베소서 1:22,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5,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7:14, 19:16, “만왕의 왕.” 요한계시록 22:1, 3,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은 주로 교회 안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그를 믿는 자들의 심령과 삶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의 주시요 왕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된다. 소요리문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왕권을 ‘은혜의 나라’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세속적, 정치적 왕권이 아니고, 교회적, 영적 왕권이다. 주 예수께서는 칼과 창으로가 아니고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요한복음 3:3, 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 안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는 온 세계, 온 우주의 왕이시다. 그는 오늘도 온 세계 안에서 참된 교회를 설립하시고 보호하신다. 그의 왕권은 온 세계, 아니 온 우주에 미친다.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에베소서 1:22, “만물을 그[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고린도전서 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요한계시록 1:5,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7:14,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거절하므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따라서 그가 재림하실 때 왕으로 오실 것이지만, 지금 교회 시대에는 왕이 아니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지금 왕이심을 증거한다. 교회는 현재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또한 그는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지금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며 능력으로 보호하신다. 물론 그의 보호의 강조점은 육적인,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있다. 누가복음 17:20, 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1:13, “그가[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현재 다 드러나 있지 않다. 그것은 장차 그가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그는 미래에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의 은혜의 나라도 장차 영광의 나라로 드러날 것이다. 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베드로후서 1:11,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선지자시요 참 제사장이시요 참 왕이시다.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다고 그를 통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고 그를 통해 환난 많은 세상과 악과 사탄의 시험을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7.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중심은 속죄 사역이다. 속죄의 진리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이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린도전서 15:3, (복음의 내용) “...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속죄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초점이다”라고 하였다.

속죄 사역의 필요성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왜 필요하였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 갈라디아서 1:4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때문에 필요하였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필요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한다. 출애굽기 34:7, “. . .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신명기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어떤 이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우리 죄의 형벌을 받으셔야 했음을 증거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가망성은 없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속죄의 죽음이었음을 분명히 증거한다. 로마서 3:25, 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둘째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필요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적 표현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9, 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속죄의 의미

속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그것을 네 개의 단어로 표현한다. 첫 번째 단어는 ‘제사’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사’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구약 제사의 기본적 의미는 제물이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속상(贖償, expiation; 죄책과 형벌의 보상)이라고 부른다. 레위기 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너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에 대한 규례는 안수가 죄의 전가를 의미함을 증거한다. 레위기 16:21, 22,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한적한 곳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이 ‘산 염소’는 ‘아사셀’(아자젤)이라고 불리웠는데(레 16:10), 그것은 ‘내어놓는 염소’라는 뜻으로서 죄의 완전한 제거와 용서를 상징하였다.

예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위하여 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심으로 그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두 번째 단어는 ‘구속(救贖이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속전(贖錢을 내고 건져낸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선택된 자들의 죄값을 다 지불하시고 그들을 사셔서 그들의 죄책과 형벌로부터 건져내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도행전 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아포뤼트로시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6:19, 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디모데전서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안티뤼트론)으로 주셨으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세 번째 단어는 ‘유화’(宥和, propitiation)이다. ‘유화’란 진노를 가라앉힌다,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셨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유화제물](힐라스테리온)로 세우셨으니.” 히브리서 2:17,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유화하려; 힐라스케스다이) 하심이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유화제물](힐라스모스)이니.” 요한일서 4:10,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네 번째 단어는 ‘화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를 좋은 관계로 회복시키셨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로마서 5:11,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린도후서 5:1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속죄 사역의 성격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몇 가지 중요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역사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 사건이 기독교 진리에 있어서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인류의 구속을 이루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며 이 사건을 믿고 이 사건을 전파한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전하니.”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객관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직 죄인들의 심령에 그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아직 죄인들 자신에게 구원이 적용되기 전에, 아직 죄인들의 심령 속에 그 죽음의 효력이 미치기 전에, 그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택자들을 위한 구속을 다 이루셨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앞에서 고찰한 속죄의 네 가지 의미들은 다 속죄의 객관성을 증거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대리적이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의 대속의 공로는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기에 충족하였다. 그의 속죄의 대리적 충족성은 그의 신성에 근거한다. 그의 신인적 인격은 그의 속죄 사역을 무한한 가치를 가진 행위로 만들었다. 이사야 53:5, 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태복음 20:28, “많은 사람의 대속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린도후서 5: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완전하였다. 그것은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완전하였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덧붙여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였다.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만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한 속죄를 다 이루셨다. 그 속죄 사역은 택자들의 죄값의 완전한 지불이며 그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의 완전한 보상이었다.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거룩하여졌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에파팍스)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0,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헤기아스메노이).”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케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예수께서 택자들의 죄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 그는 택자들을 위해 완전한 대속 제물이 되셨다. 이제 예수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죄씻음과 완전한 의를 받았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참자유와 평안이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께 대한 참감사와 사랑과 헌신의 이유가 있다.

잘못된 속죄설들

역사상, 잘못된 속죄설들 중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사탄 속전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탄에게 속전(贖錢, ran- som)으로 내어준 죽음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사탄 배상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며, 죄인에 대한 법적 권한을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 구절인 히브리서 2:14 은 그들의 생각을 지원하지 않는다.

도덕감화설 혹은 모범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자기 희생적 사랑과 모범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한 모범적 선생이요 한 고귀한 순교자이셨으며 그의 모범적 사랑이 죄인을 구원에 이르도록 감동한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도덕 감화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의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요 확증인 것이 사실이지만, 십자가의 의미가 그것뿐이라면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대속이 없다면, 여전히 우리의 죄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 이 견해는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가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며, 그것은 성경적 복음의 핵심을 부정하는 큰 오류, 이단적 오류이다.

도덕적 통치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미워하심의 표시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도덕 세계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가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를 교훈하셨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도덕적 통치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개념과 조화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공의의 심판을 내리신다. 그것은 단지 피조물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런 교훈적 의미뿐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복음도 없다. 그것은 성경적 복음을 부정하는 이단적 오류이다.

신비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육신으로 그의 인성이 정결케 되셨고, 사람들이 그를 믿음으로 그의 새 인성에 신비적으로 연합됨으로써 의를 주입받아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흔히 ‘신비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의 성육신을 중시함으로써 그의 죽음의 중요성을 부정하며, 또한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개념을 바르게 가지지 못한다.

속죄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속량하신 자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상에 대해서는, 역사상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보편속죄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한속죄설이다. 보편속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 견해의 전제는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고, 그 견해의 핵심적 생각은 구원이 궁극적으로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알미니우스주의라고 부른다. 이와 구별하여, 제한속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만을 대속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를 원하셨는가, 아니면 인류 중 일부 즉 그가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전체를 위해 즉 인류 전체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는가,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만을 위해 돌아가셨는가?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구원의 보장(保障)의 문제와도 관계되며, 또 전도할 때 전도자의 실제적 마음가짐에도 관계된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문제는, 사람의 구원이 오직 인간 자신의 결심에 달려 있는가, 혹은 달리 표현하여, 하나님께서 실제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주이신가이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한성을 성경적 진리로 고백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의 근거는 다음 3가지 요점으로 서술될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밝히 가르치며 또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가르친다.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요나 2:9,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마태복음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로마서 9:16, 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 .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야고보서 4:12, “(하나님은) 능히 구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그 외에도, 마태복음 16:17,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사도행전 11:18,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사도행전 16:14,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또 하나님의 예정이 효력이 있다는 사실도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확증한다. 요한복음 6:39,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러한 모든 말씀들을 볼 때, 사람의 구원이 오직 자신의 결심(회개와 믿음)에 달렸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또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거나 제한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고 뜻하셨다면,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시는 일이 없다. 그런데 보편속죄설은 사람의 구원이 자신의 결심에 달렸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구원의 능력을 부정하는 잘못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시지만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변화시키실 수는 없고 또 변화시키시려고도 하지 않으신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는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와 선택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제한성을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이 않다면, 선택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경은 인류 전체와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기 백성, 자기 사람들, 자기 양들에 대해 분명히 증거한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0: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민족들과 구별하여 사랑하심도 하나님의 구원의 제한성을 증거한다. 호세아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도 구원의 제한성을 암시한다. 이사야 53:5, 6, 8,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또한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도 구원의 제한성을 암시한다. 이사야 53:11, 12,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의롭다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마태복음 20:28,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알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히 크심을 옹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부정한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어떻게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분만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그 나머지를 영원한 멸망 가운데 버려두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믿는 보편 구원을 주장하지 않는 한--그리고 물론 보편 구원론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그들의 보편적 속죄설은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옹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능력을 가진 전능자가 죄로 멸망하는 인생을 관망만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분을 영원한 멸망에 버려두셨다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속죄는 실제로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속죄의 본질적 성격에 있다. 속죄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우리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사도행전 20:28, “주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는 결코 헛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어떤 사람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는데 그가 멸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영원 전에 선택된 자들, 곧 그의 양들을 위하여 속죄의 피를 흘리셨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그들, 바로 그가 피흘려 사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신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다면, 멸망 받을 죄인이 세상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아야 하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속죄의 본질적 성격상 피 값을 주고 사신 자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편속죄설은 논리적으로 보편구원론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은 성경적 진리일 수 없다. 마태복음 7:13,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누가복음 13:23, 24, “구원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죤 오웬(John Owen)은 제한속죄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증명하였다.

성부께서 그의 진노를 부과하시고 성자께서 그 형벌을 받으신 것은 (1)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서든지, (2) 일부분의 사람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서든지, 혹은 (3) 모든 사람들의 일부분의 죄들을 위해서이다. 각 경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만일 마지막 경우가 참되다면, 모든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할 어떤 죄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두 번째가 참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선택된 자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을 것이고 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만일 첫 번째가 참되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죄로 인한 형벌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가? 불신앙 때문이라고 여러분은 대답한다. 나는 묻는다. 이 불신앙은 죄인가 죄가 아닌가? 만일 그것이 죄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으로 인한 형벌을 받으셨거나 그렇지 않거나 할 것이다. 만일 주께서 받으셨다면, 왜 그것이 주께서 대속하신 그들의 다른 죄들 이상으로 그들에게 방해가 되어야 하는가? 만일 주께서 그것의 형벌을 받지 않으셨다면, 그는 그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는 말이 될 것이다.

보편속죄설을 지지하는 듯한 구절들

에스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공평함과 의로움을 강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이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공평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가 그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그의 적극적 의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위에서 언급된 진리들, 특히 선택의 진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구절도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보이는 듯하다. 과연 그러한가? 만일 그러하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보이는 여러 구절들, 특히 선택의 진리의 구절들과 모순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도 다른 구절들과 조화시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세 가지의 가능한 해석이 있다.

(1) 이 구절은 에스겔 18:23과 비슷하게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가 곧 그의 적극적 구원 의지와 동일하지는 않다.

(2)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 대략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경에서 특히 디모데전후서에서 ‘모든’이 대략적 의미로 사용된 예들이 많다. 디모데전서 2:1,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하되].” 디모데전서 4:15,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디모데후서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디모데후서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3)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 ’선택된 자들 모두‘라는 제한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요한복음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디모데전서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이것도 보편 속죄를 보이는 듯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도 역시 다른 많은 구절들과 조화시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대략적 의미 혹은 제한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1)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가리키든지, (2) 각계각층의 사람 모두를 가리키든지, 혹은 (3) 택한 받은 사람 모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구절의 ‘너희’는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한속죄의 진리는 어떤 이들이 오해하듯이 결코 전도의 필요성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선택과 속죄 뿐만 아니라, 또한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죄인을 구원하는 필수 과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를 믿는 동시에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하고, 바로 그러한 진리들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담대히, 낙심치 말고 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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