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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삶

외눈박이가 된 최북 崔北 / 조희룡의 <예인전>

by 싯딤 2009. 11. 29.

출전:<문 밖을 나서니 갈곳이 없구나 / 최기숙>에 실린 조희룡의 <예인전> 

 

 

 

           조희룡의 <예인전>  /  

     외눈박이가 된 최북

 

 

                  최북

 

 

 

                         최북의 ‘공산무인도’

두 그루의 나무 아래 빈 초가 정자가 한 채 있고, 왼쪽에 계곡물이 흐른다. 빈 정자는 적막하다. 계곡물 소리만 하얗게 피어난다. 그 탓에 적막감이 더 커진다. 움직이는 요소라고는 오직 계곡물 뿐이다. 이 그림은 중국의 유명한 시인 소식의 시 구절 “빈산에 아무도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최북崔北(1712~1786)은 자가 칠칠七七이니, 자 또한 기이하다. 산수와 가옥, 수목을 잘 그려서 필치가 짙고 무게가 있었다. 황공망黃公望(원나라 때 화가)을 존경해 사숙私淑(존경하고 사모함)하더니 끝내 자기의 독창적인 필법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스스로 호를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생관毫生館이라 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격정적이고 우뚝한 성품으로 작은 규범으로 자신을 속박하지 않았다.

일찍이 어떤 집에서 한 높은 벼슬아치를 만났는데, 그가 최북을 가리키며 주인에게 물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에 최북은 얼굴을 치켜들고 벼슬아치를 보며 말했다.

‘먼저 묻겠소. 당신은 누구요?’

그 오만함이 이와 같았다.

 

그가 금강산을 유람을 하다가 구룡연에 이르러서 갑자기 크게 외치기를,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으면 족하다.’라 하고는 구룡연에 뛰어들려 했는데 거의 구하지 못할 뻔하였다.

 

또 어떤 한 귀인貴人이 최북에게 그림을 청하였는데 들어주지 않자 그를 협박하려 하니 최북이 성내며 말했다.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요,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

그리고는 곧 자신의 한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 늙어서는 한 쪽에만 안경을 낄 뿐이었다. 나이 49세에 생을 마치니, 사람들이 ‘칠칠七七’이라는 이름이 들어맞았다고 하였다.

호산거사(조희룡)가 말한다.

‘최북의 기풍이 매섭구나, 왕공王公 귀족에게 아첨하지 않으면 족할 것을, 어찌하여 스스로를 이처럼 괴롭힌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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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을 그린 이재관

 

 

이재관의 '파초하선인도'  6폭의 선인도 중 한 폭으로 굵은 붓으로 농묵을 듬뿍 찍어 유려한 필치로 그려냈다.발문은 조희룡의 글씨로 추측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재관李在寬(1783~1837)은 자가 원강元剛이요, 호는 소당小塘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려 팔아 가족을 부양했다. 특별히 어떤 화가를 본받거나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는데도 옛 법도에 꼭 들어맞으니,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할 것이다. 안개와 구름, 초목과 새, 짐승, 벌레, 물고기 그림이 모두 정교하여 신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려, 전후 백년 사이에 그와 견줄만한 필법이 없었다. 일본인들이 해마다 동래관에 와서 소당의 그림, 특히 새나 짐승의 그림을 사들이는데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태조의 초상화 한 폭이 영흥부永興府 준원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병신년(1836) 겨울, 도적에게 훼손당했다. 이에 이듬 해 봄에 원본을 경희궁에 옮겨 모시고, 소당에게 다시 베껴 그리게 해서 본전에 봉안하였다. 그 공로로 특별히 등산登山(함경도 고을) 첨사僉使를 제수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병으로 집에서 죽었는데 그 때 나이 쉰다섯이었다. 내(조희룡)가 시를 지어 그를 조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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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린 손의 예인藝人, 김홍도 

 

김홍도金弘道(1745~?)는 자가 사능士能이요 호는 단원檀園이다. 아름다운 풍채와 태도에 마음은 호탕하고 구애됨이 없어 사람들은 그를 신선세계에 사는 인물이라 했다. 그가 그린 산수, 인물, 화훼, 날짐승과 길짐승은 묘함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특히 신선을 잘 그렸다.

준찰皴擦(필묵 사용법), 구염句染(윤곽선), 구간軀幹(사람 체구 표현법), 의문衣紋(옷주름)을 앞 사람들 것을 답습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운용하여 정신과 그림의 생리가 시원스럽고 광채가 혁혁하여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니 예원藝園의 특별한 솜씨였다.

 

그가 정조 때 대궐에서 도화서의 화원으로 있었는데 매양 한 폭 그림을 올릴 때마다 임금의 마음에 들었다. 임금이 일찍이 회칠을 한 큰 벽에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를 그리도록 했다. 홍도는 환관에게 진한 먹물 두어 되를 갈게 하더니 모자를 벗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서서 붓을 휘두르기를 비바람이 몰아치듯 하니 두어 시간이 못되어 완성했다. 그림 속 바닷물은 세차게 약동하여 집을 무너뜨릴 기세였고, 사람은 그 생동하는 모습이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듯했다. 옛 적 대동전 벽화가 이보다 나을 수 없었다.

또 임금이 금강산과 사군四郡(단양, 청풍, 영춘, 제천)의 산수를 그리라고 했을 때는, 각 고을에 명하여 음식 대접을 경연에 참여하는 신하에게 하듯 대접하도록 하니 이는 남다른 대우였다.

 

 

김홍도의 다른 '군선도'  1776년, 8폭에 상상의 신선을 생동감있게 그려냈다. 호암미술관 소장

 

그는 음직陰職으로 벼슬이 연풍 현감에 이르렀다. 원래 집이 가난하여 간혹 끼니를 잇지 못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팔려고 내놓았는데 매우 기이하여 사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못 사고 있는데, 마침 돈 3,000 전錢을 보내준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단원한테 그림을 받기 위한 예물이었다. 이에 2,000 전을 떼어내 매화를 사고 800 전으로는 술 몇 말을 사서 동인同人들을 모아 매화를 감상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남은 200 전은 쌀과 땔나무를 샀다. 큰 돈이 들어와도 하루 생계도 되지 않았으니 그의 소탈하고 호방함이 이와 같았다.

 

아들 김양기金良驥는 자가 천리千里, 호는 긍원肯園이라 했다. 그는 그림에 가법을 이어받아 산수와 가옥, 나무를 잘 그렸는데 아버지보다 낫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와 절친했는데 이제는 죽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찬贊한다.

“예우倪迂의 그림은 앞사람의 자취를 쓸어낸 데다 그 소쇄함이 세속을 벗어났으므로 강좌江左 사람들이 예우의 그림이 있고 없음으로써 사람의 고상함과 속됨을 정했다. 원나라 때 이름난 화가가 성대히 일어났으나 그 중 예운림이 드높고 빼어났던 것은 특히 그의 인품이 높았기 때문이다.

김홍도가 긍재 김득신, 호생관 최북, 고송류수관 이인문 사이를 독보적으로 왕래한 것은 어째서일까? 그 까닭은 ‘인품이 높아야 필법 또한 높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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