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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삶

거지 두목 이야기

by 싯딤 2009. 11. 26.

 

 

거지 두목 이야기 

 / 성대중의 <개수전>

 성대중(1732~1812)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서얼 출신이었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으나 서얼이라는 한계로 북청부사 벼슬에 그쳤다. 거지 우두머리 이야기를 담은 개수전은 그의 저서 <청성잡기> <해총> <동야휘집>에 전한다.

 


김홍도의 기로세련도<부분>    개성 상인의 잔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흥겨운 잔치 마당을 거지가 놓칠 리 없다. 그림 하단과 우측 중간 부분에 구걸하는 거지 모습이 보인다.


 

  

서울에는 수백명의 거지가 산다. 그들에게는 무리 중에서 한 명을 뽑아 두목으로 삼는 법도가 있다. 행동거지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두목의 명령대로 했는데 조금도 어김이 없다. 아침저녁에 구걸한 것으로 두목을 봉양하고 공손하게 받들었으니, 두목이 사는 법이 이러했다.

 영조 경진년(1760)에 크게 풍년이 들자, 임금이 조정과 민간에 잔치를 열어 즐기라는 명을 내렸다. 용호영龍虎營(조선후기에 설치된 군영. 궁궐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함)의 음악이 오군영 중에서 으뜸이었는데,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우두머리였고, "패두"라 불렸다. 평소 호협하게 거동하는 그를 서울 기생들이 모두 따랐다.

 한편 당시에는 금주령이 매우 엄해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잔치를 열면 기생의 풍류만을 즐길 수 있었다. 그 중 으뜸으로 치는 용호영의 풍류를 청하는 곳이 많았는데, 불러서 오지 않으면 청한 자는 부끄럽게 여겼다. 이 패두는 불려 다니느라 피곤해서 때론 병을 핑계 삼아 집에 있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지 한 명이 찾아와 이렇게 청했다.

 "저희 두목님이 패두님께 공손히 청하라셨습니다. 나라에서 명을 내려 만백성이 함께 즐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저희들이 비록 거지라고 하나 또한 나라의 백성입니다. 저희가 아무 날 연융대鍊戎臺(군대의 훈련 장소)에 모여 잔치를 열려고 합니다. 감히 패두님께 수고를 끼쳐 풍류를 도와주십사 청하옵니다. 소인들, 그 덕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 패두는 매우 노해 꾸짖었다.

 "서평군(종실, 영조의 탕평책에 이바지가 컸다.)과 낙창군(종실)의 요청에도 내 가지 않았거늘, 어찌 거지들을 위해 연주한단 말인가?"

 그러고는 종을 불러 내쫓았는데, 거지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갔다. 이 패두는 더욱 성이 나서 꾸짖었다.

 "음악이 천하게 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거지까지 나를 부리려 하는구나!"

 그리고나서 잠시 후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패두가 나가 보니 찢어진 옷을 입었지만 몸집이 건장한 거지 두목이었다. 그가 눈을 똑바로 뜨고 이 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패두님 이마는 구리로 되었소? 집을 물로 지었소? 우리 무리가 수백 명이고 성 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순라군도 누구냐고 묻는 법이 없소. 몸둥이 하나, 횃불 하나면 아무리 패두님이라 해도 무사할 수 있을까? 어찌 그리 우리를 업신여긴단 말이오?"

 이 패두는 풍류로 노는데 도통하고 마을의 이런 저런 일에 익숙한 지라 웃으며 응대했다.

 “자네, 진정한 남자일세. 내가 몰라서 실수했네. 자네 말대로 함세."

 거지 두목이 말했다.

 “내일, 아침을 드시고 나서 패두님이 기생, 악공들과 함께 총융청 앞 계단에서 크게 풍류를 베풀어 주시오. 기약을 어기면 아니 되오.”

 이 패두는 웃으며 그러마고 했다. 두목은 주의 깊게 응시하고는 자리를 떴다.

 이 패두가 무리를 불러 거문고, 피리, 장고 등을 새 것으로 갖추어 오라고 하고, 기생도 몇 명 불러 들였다. 그들이 어디 가느냐고 묻자 이 패두가 웃으며 말했다.

 “나만 따라 오너라.”

 드디어 총융청 앞 계단에 이르러 말했다.

 “음악을 연주해라.”

 모든 악기가 연주되고 기생들은 춤을 추었다. 이 때 거적을 쓰고 새끼줄을 두른 거지들이 춤추며 모여들었는데 마치 개미가 언덕으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춤이 그치면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그치면 다시 춤을 추었다.

 “좋다 좋아! 우리에게도 이런 날이 있구나!”

 거지 두목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흡족해 했다. 기생들이 모두 의아해 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패두가 그만 두라고 눈짓했다.

 “웃지 마라. 저 두목은 나도 죽일 수 있을 것이야. 하물며 너희들이야 어떻겠는냐?”

 날이 저물자 거지들이 차례대로 앉아서 각자 자루를 뒤졌다. 어떤 이는 저민 고기 한덩이를 꺼내고 어떤 이는 떡 한 덩이를 꺼냈다. 모두 잔치집 등에서 구걸한 것이었다. 깨진 기와에 담아 풀로 묶어서 이것저것을 패두에게 바치며 말했다.

 “소인들이 잔치를 열었으니 감히 나리께 먼저 대접하겠습니다.”

 이 패두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자네들을 위해 풍악을 울릴 수는 있네만 음식대접은 받을 수는 없네.”

 그러자 거지들이 웃으며 절했다.

 “나리는 귀한 분이라 거지 음식을 꺼리시는 게죠? 나리를 위해 저희가 다 먹습죠.헤헤.”

 이 패두는 기생들에게 음악을 연주해 잔치의 흥을 더욱 돋우라고 명했다.

 잔치가 파하자 거지들이 다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조금 뒤에 과자 부수러기와 흐물흐물한 나물을 기생들에게 주며 말했다.

 “수고에 보답할 게 없네. 자네들 어린 아이나 갓난애들한테 갖다 줌세.”

 기생들이 새침하게 사양하며 뿌리쳤다. 거지들이 다 먹고 나자 절하며 말했다.

 “덕분에 실컷 먹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거지 두목이 앞으로 나와 절하며 말했다.

 "우리는 저녁거리를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수고에 감사드리오. 다음에 길에서 만납시다.

 거지들이 흩어져 갔다. 기생들은 모두 배가 고프고 피곤해서 이 패두에게 화를 냈다. 그런데 이 패두는 감탄을 하며 말했다.

 "내가 오늘에야 진정한 쾌남자를 보았구나. 나중에 거지를 만나면 마음으로 알아 볼 수 있을게야."

 하지만 끝내 그 거지를 볼 수는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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