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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비 글

과거시험 문답 - 김구/`술의 폐해`

by 싯딤 2010. 3. 25.

  

<중종 11년(1516), 별시 문과> 과거시험 문제 

 

              술의 폐해

 

 

김구의 <자암집>


 

김구(金絿, 1488~153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유, 호는 자암自庵과 삼일재, 시호는 문의, 본관은 광산이다.

 1507년 생원, 진사에 장원급제, 1511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장원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된 후 부수찬, 부제학을 지냈다. 1519년에 기묘사화로 조광조, 김정 등과 투옥되어 개령으로 유배당했다가 남해, 임피로 옮겨졌다가, 1533년 풀려나 고향 예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조선전기 4대 서예가 중의 한사람으로 꼽히며, 그의 서체를 서울 인수방仁壽坊에 살아서 인수체라 했다. 사후, 선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예산 덕잠서원, 군산 봉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자암문집>, <이겸인묘비>, <자암필첩>, <주영허첩> 등이 전한다.

 

 

 

<책문>

 술이 화가 된 지는 오래이다. 그 근원은 언제부터인가? 우왕은 향기로운 술을 미워했고, 무왕은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으며, 위왕 무공은 술 때문에 저지른 허물을 후회하는 시를 지었다. 술의 폐해를 크게 염려했으면서도 모두 그 근원을 끊지 못했으니 어째서인가? 후세 임금 중에 술 때문에 망한 사람이 많은데, 하나하나 열거하여 말 할 수 있는가?

우리 조정의 여러 훌륭한 임금들도 대대로 술을 경계하였다. 세종대왕께서 글을 지어 조정과 민간에 유시하신 것은 세 성인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오늘날 아랫사람들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이 더욱 심해져 어떤 자는 술에 빠져 일을 하지 않고, 어떤 자는 술에 중독되어 덕을 무너뜨린다. 흉년을 당하여 금주령을 내려 막아도 민간에서는 끊임없이 술을 빚어 곡식이 거의 없어질 지경이다. 이를 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대책>

 김구

 집사선생께서 봄날 과장科場에서 술의 화禍를 책문으로 삼으시어, 먼저 역대의 폐단을 거론하고 오늘을 언급한 다음, 구제하는 방도를 듣고자 하시니, 제가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어찌 애매모호하게 대답하여 기대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건데, 천하에는 생기기 쉬운 화와 구제하기 어려운 화가 있습니다. 생기기 쉬운 화는 물화物禍이고, 구제하기 어려운 화는 심화心禍입니다. 구제하기 어려운 것이 먼저 나타나고, 생기기 쉬운 것은 뒤에 나타나니, 심화는 원인이고 물화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나무가 병이 들면 좀이 슬고, 젓갈에 악취가 나면 구더기가 들으니, 술의 화가 심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술의 화는 심각합니다. 사람에게는 떳떳한 성품이 있는데 술이 그것을 해치고, 차례에는 오륜의 질서가 있는데 술이 그것을 어지럽히고, 만사는 제도가 있는데 술이 그것을 없애 버리니, 술은 성품을 베는 도끼입니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도 술을 마시면 어리석어지고, 명철한 사람도 술을 마시면 혼미해지고, 강한 사람도 술을 마시면 나약해지니, 술은 마음을 공격하는 문門입니다. 그래서 천하의 어느 누구라도 "술은 사람에게 재화을 입히니 즉시 없애야 하고, 술은 체통을 잃게 하니 즉시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술의 화가 크지만 쓰임새 또한 큽니다. 술은 제사를 지내고, 종족을 화합하는데 쓰이며, 온갖 예를 이루게 하고, 군신간에 잔치를 베푸는데 쓰이니, 어찌 없앨 수도 있으며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음양∙풍우∙회명陰陽風雨晦明은 하늘의 여섯가지 기운입니다. 사람이 기운을 과도하게 써서 병이 나면 의사가 ‘여섯 기운이 병을 낫게 하는 원인이니, 음양∙풍우∙회명을 없애야 병을 고칠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돌팔이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몸을 지키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은 몸을 지키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지, 여섯 기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수양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는 마음을 수양하지 못해서 당하는 것이지 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술만 탓하고 마음을 탓하지 않거나, 물화만 근심하고 심화를 근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성품을 잃어버리고, 몸을 망치고, 병을 불러들이고, 화를 초래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현명한 임금은 몸을 수양해 아랫사람을 이끌었고, 훌륭한 선비가 마음을 수양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하지 못한 임금과 용렬한 사람은 그러하지 못해 나라를 망치고 집안을 폐한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현문에 대하여 아뢰겠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청렴하고 담백한 풍기가 있었고, 풍속도 소박하고 백성이 순진하여 아직 제도를 만들지 않았고, 땅의 마땅함을 좇아서 물로 술을 빚었습니다. 요∙순 왕과 우왕도 제사 때 그것을 썼습니다. 그런데 의적(하나라 때 사람, 처음 술을 빚은 것으로 알려짐)이란 사람에 이르러이 향기로운 술을 빚은 뒤부터, 은∙주나라가 이를 쓰게 되었으니,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겠습니다.

 맹자가 말씀하신 '맛있는 술을 미워했다.'는 말을 살펴보면, 우왕이 술의 화에 대해 얼마나 많이 염려했는지 알 수 있고, <서경> <주서周書> ‘주고酒誥’편을 보면, 무왕이 술의 화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대비했음을 알 수 있고, 또 <시경> <소아小雅> '빈지초연賓之初筵'이란 시를 보면, 위나라 무공이 술의 화에 대해 많이 후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술의 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복을 입고 있을 때라도, 병이 생기면 술을 마신다.'는 말이 <서경> <하서>에 있고, '주인酒人'의 관직이 <주례周禮> <주관>에 나와 있고, '저 큰 술잔에 술을 따른다.'는 구절이 '자신을 경계하는 시(自警之詩)'에 실려 있으니, 그 근원을 끊기 어려운 것은 분명합니다. 우왕이나 무왕, 위나라 무공같은 덕이 고귀한 분들이 술의 화를 깊이 후회하면서 단단히 대비하려고 했던 것이 어찌 술이 사람을 망치지 않고 나라를 해치지 않는데도 그들이 그렇게 했겠으며, 그들의 교화가 백성들을 이끌기에 부족하지 않은데도 그렇게 했겠습니까?

 하지만 술은 예를 이루는 도구로서, 나이 든 어른을 높이 받들고, 손님을 대접할 때 쓰이니 감히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손님과 주인이 여러차례 절을 하고 술을 세 차례 돌린다.’ 라는 말이나, ‘하루 종일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라는 말도 있으니, 사람이 때에 맞게 술을 마시고 절도 있게 사용한다면, 성품이 포악해지거나 감정이 격해지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이 술을 쓰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또 술을 금지할 수 없음도 알기에, 술잔에조차 경계는 뜻을 새겨 놓았습니다. '상觴'이라는 술잔에 술을 채우는 것은 상傷함을 경계한 것이고, '치卮'라는 둥근 그릇으로 술을 뜨는 것은 위태로움危을 경계한 것이니, 이는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술잔을 입에 댈 때, 환난을 생각해서 미리 방지할 바를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인이 심화를 먼저 금지하고 물화를 나중에 금지한 것은, 물화는 생기기도 쉽지만 구제하기도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아! 세상의 도가 쇠퇴하고 미약해지고, 인심이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폭군과 용렬한 왕들이 '마음을 수양하는 도'와 '화를 떨쳐버리는 근본'을 알지 못하여 줄줄이 패망하니, 모두 술로 인한 재앙입니다. 주지육림에 빠진 걸∙주, 술과 여색을 탐닉한 성제成帝(전한 11대 황제), 요사한 음률과 춤과 술로 방탕하게 지낸 진 후주後主(진나라 마지막 황제)를 비롯하여, 수 양제와 당 현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술을 절제 없이 마셔 똑같은 화를 당했습니다. 이런 부류는 좌계左契(둘로 나눈 한쪽의 것으로 약속의 증거)를 잡고 ‘수효를 세는 도구’로 세어도 죄책을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일이 세어 듣기를 원하시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다만 백에 하나 정도만을 거론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례를 말씀드리면, 여러 훌륭한 임금께서 대대로 요순시대와 삼대의 풍속을 되찾고자 애쓰셨고, 요순과 우∙무왕의 마음을 체득하시어 반드시 먼저 백성들의 심화를 막고 난 뒤에 술의 화를 막았습니다. 태종대왕 때 사람들이 모여서 술 마시는 것을 처음으로 금지했고, 이어서 세종대왕 때 술을 경계하는 글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하의 우왕이 향기로운 술을 미워하고, 주 무왕이 매방 사람들에게 술을 경계시키며, 위 무공이 '빈지초연'이라는 시를 지은 마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술에 빠지는 습관에서 벗어나 순박한 옛 풍속을 좇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전에는 굴대 비녀장을 빼어 우물에 던지고는 못가게 간곡히 막아 누추한 집에서나마 편히 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손님을 억지로 붙잡아 둔 채 술단지가 고꾸라질 정도로 술을 마셔대는 풍조가 있습니다. 사대부들이 비록 술주정을 할 정도로 마시기는 해도, 얼굴이 벌개져서 누룩을 베거나 술지게미를 깔고 누울 정도로 진창 마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서민들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서로 사양하는 예가 질서정연한 자리에서 행해졌다거나 거동이 신중하고 온순한 빛을 띠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유달리 성상께서 다스리는 이 때에 와서 백성이 날로 술마시기를 숭상여 점점 심하게 탐닉하고 심지어는 술에 빠져 일을 돌보지 않는 자가 있고, 정신이 혼미해져 덕을 무너뜨리는 자가 있습니다. 고관대작의 집에서는 밤낮으로 비틀대며 춤을 추고, 길거리에서는 시끌벅적하게 싸우고 떠들고, 음란하고 방탕한 사람을 세상은 '달관했다.'하고, 술과 여색에 무심한 사람을 오히려 썩어빠졌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부모의 상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거리낌 없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재계齋戒하는 중에도 여전히 술을 마셔대니, 천자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삼년상을 행하는 뜻은 어디에 있으며, 재계하고 경건하게 지녀야 할 몸가짐은 어디에 뜻이 있습니까?

 술과 고기는 같은 용도의 물건인데 지금은 따로 둘 다를 얻으려고 하니, 매우 어그러진 풍속입니다. 술이 생기면 삶은 돼지와 닭국까지 구해 먹으려고 하니, 어느 누가 편안하겠습니까? 조정에서도 이렇게 하고 서울에서도 이렇게 하며 사방에서 이와같이 행하니, 이것이 무슨 풍속입니까?

 근래, 해마다 흉년이 들고, 왜변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아비와 자식이 서로 보전하지 못하고 서로 이리저리 흩어지니 집 울타리만 쓸쓸하게 남아, 닭 우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마저 드뭅니다. 그런데도 사대부 집안에서는 날마다 술 마시는 것을 일삼고, 화려하게 꾸민 방에 예쁜 아이와 여자를 들여 놓고, 깊숙한 당堂에 기생들을 불러 춤과 노래를 하게 합니다. 소, 양, 돼지고기는 너무 많아 냄새가 진동해 먹을 수 없고, 여러 번 빚은 진한 술은 썩어서 마실 수 없을 정도이니, 그들은 흉년으로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도는 것에는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정자程子(송대 학자)가 흰 쌀밥을 먹지 않고, 공의휴公儀休(노나라 재상)가 고기를 받지 않은 것과 어찌 이리 다릅니까?

 나라에서 하루에 세 번씩이나 금주령을 내려도 어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아! 샘에서 흘러나와 범람하고 길이 열려 사방으로 통하는 법이니, 민간에서 끊임없이 술을 빚어대어 곡식이 고갈되는 것이 어찌 이상하겠습니까? 풍속이 이렇게 변하고 선비의 습관이 이렇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이 점차 경박해져 아랫사람들이 저절로 더렵혀진 것입니까, 아니면 교화가 밝지 않고, 기강이 서지 않아 이렇게 된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것이 모두 연산군 대의 풍습인데 아직까지 개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저는 감히 그렇지 않다고도 못하겠고 그렇다고도 못하겠습니다. 오로지 윗 사람이 마음으로 인도하지 않고 법으로만 금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있는 사람이 진실로 마음을 바르게 하여 능히 그 폐단을 구제한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 또한 마음을 바르게 하워 능히 습관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사람들은 술이란 제사를 위해 만든 것이지 놀고 즐기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잔치 때 마시기 위한 것이지 곤드레만드레 취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각자 의지를 갖고 분수를 지키면, 술이 내 마음을 침범하지 못하여 마음에 욕망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술의 화가 내 몸을 상하게 할 수 없게 되어 수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술 대신 선을 숭상하고 의를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의를 좋아하면나라를 위하여 진력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이니, 어찌 일을 폐하는 사람이 있을까 근심하겠습니까? 또 선을 숭상하면 배우기를 힘쓰고 도를 좇느라 정신이 없을 터이니, 어찌 정신이 혼미해져 덕을 그르치는 사람이 있을까 근심하겠습니까? 또 이렇게 되면 설사 진한 술과 연한 고기를 권하더라도, 분수를 넘거나 절도를 넘지 않을 것이니 술 빚는 것을 끊지 않더라도 곡식이 고갈될 것을 어찌 염려하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제가 일찍이 세상살이를 미루어 오늘날의 풍속을 보건대, 병은 거의 깊어 고치기가 어려운 상태이고 썩어서 어찌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진실로 위에 있는 사람이 시간을 아끼고 주의를 기울여, 배우기에 힘쓰고 마음을 밝히지 않고, 다만 구구한 법령으로만 바로잡고자 한다면, 명령을 해도 간사하게 응할 것이고 법을 내려도 거짓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땔나무를 안고 불을 끄고, 뜨거운 것을 끓는 물로 식히려 하는 것과 같아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양웅楊雄(전한의 학자)이 "정나라∙위나라의 악조는 설령 기(순나라 때 음악을 맡은 관인)로 하여금 연주를 시킨다고 해도 소소(순임금 때 음악을 맡은 관인)가 될 수 없다." 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정사는 연산군의 퇴폐적인 정치를 거치는 동안 진∙ 수수나라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국가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개혁을 이행하는 데 있습니다.

 옛날에 무왕은 주왕의 악에 물든 매방을 간절히 타이르고 경계하면서도 오히려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까 염려했습니다. 하물며 지금 우리나라는 삥 둘러 온 사방이 매방처럼 되었으니, 주상의 간절한 마음이 무왕의 마음보다 아래에 있어서는 어찌 술의 화를 바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제 견해는 이와 같습니다. 다행히 집사선생께서 괜찮다 여기시어 제 견해를 전하께서 들을 수 있도록 하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

 

 

<대동기문>에 나타난 '김구'

 

김구(1488-1534)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대유, 호는 자암이다. 예조 판서 김예몽의 증손이다. 16세에 한성시에 장원하고, 중종 2년(1507)에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장원하였으며, 동왕 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 때에 부제학으로서 개령으로 귀양갔다가 남해로 옮겨 섬 속에서 13년을 지내는 동안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중종 26년에 임피로 옮겼다가 동왕 28년에 석방되자, 예산으로 달려가서 부모의 분묘에서 곡하고 추모의 정을 펴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분묘에 올라 눈물을 흘리니, 그 자리에 있던 풀과 나무가 다 말라 버렸다. 그로 인해 병이 들어 1년 만에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김안국이 소싯적에 생원, 진사의 회시에 모두 장원이 되었는데, 방을 발표할 때에 "한 사람이 두 장원이 될 수 없다" 하여 진사는 2등이 되니, 평생 그것을 한으로 여겼다. 김안국이 시관이었을 때 김구가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장원이 되자, 모든 시관이 "한 사람이 두 장원이 될 수 없다" 하였지만, 김안국이 분연히 말하였다.

"왕희지의 글씨와 한퇴지의 문장으로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김구는 드디어 두 장원이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그 이듬해인 중종 15년(1520) 봄에 김구의 부인이 말 한 필에 짐 한 바리를 싣고 종 5, 6명을 데리고 김구의 적소를 따라갔다. 그때 김식이 도망 중이어서 현상을 걸고 그를 체포하는 영이 매우 엄하여, 갈림길에 나졸들이 늘어서서 지키며 여행자는 모두 수색 검문한 뒤에야 보냈다. 경상감사 반석평이 노상에서 한 부인의 행차가 붙잡혀서 가지 못하고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양곡을 주고 또 감영의 소속 아전을 시켜 그 일행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김구는 마침내 죽림에 집을 짓고 살았다.

김구는 문장이 기이하고 필력이 굳세어서, 위의 종유와 진의 왕희지의 필법을 사모하여 본받았다. 중국 사람이 자기 글씨를 귀중하게 여긴다는 말을 들은 뒤로 글씨를 쓰지 않아서 필적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김구의 필법을 '인수체'라 했으니, 이것은 김구가 인수방에 살았기 때문이다.

김구가 한번은 옥당에 당직하고 있을 때이다. 달밤에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나가 보았더니, 임금이 걸어서 옥당까지 오고 별감이 술을 가지고 따라왔다. 김구가 종종 걸음으로 나가 엎드리자 임금이 말했다.

"달이 이처럼 밝으므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내가 이곳에 이르렀다. 어찌 임금과 신하의 예로 대하랴. 마땅히 벗으로 서로 대해야 한다."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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