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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비 글

과거시험 문답 - 성삼문

by 싯딤 2009. 4. 22.

이 글은 <조선과거실록,지두환, 1997>에 실린 성삼문의 과거시험 답안입니다. 1447년(세종 29년)에 실시된 문과 중시에서 성삼문은 29세 나이로 장원급제하였으며, 이로부터 9년 후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38세의 나이로 처형당하였습니다.

 

 


성삼문의 영정, 서체

 

 

 

<책문 策問>

왕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후한後漢에서는 도시하는 날에 군사를 일으키는 폐단 때문에 군국의 도위를 줄이고 거기의 재관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960∼976)는 당 말기에 번진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 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649)은 신하를 염치고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얘기할 수 있었는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光武帝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가 주관하였으니,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라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마음대로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되었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그대 대부들은 사책史策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대책對策>

                                                                                            성 삼 문

 신이 들으니,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본이고, 법은 정치를 하는데 필요한 도구라 합니다. 만 가지 변화가 마음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고, 여러 정치가 마음이 아니면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윗사람이 된 자가 마음을 보존하고 법을 들어 정치를 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옛날 현명한 임금은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데 이와 같이 했을 뿐이었습니다.

삼가 공경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성군으로서 훌륭하신 선대의 임금을 계승하여 온 정성을 다해 다스리길 도모하시니 정치를 하는 근본이 이미 섰고,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도구도 잘 시행되어 시사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구제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시어 과장科場에 신들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병을 설치하는 것·대신을 예로 대하는 것·정권을 나누는 것·정방을 다시 세우는 것 이 네 가지를 질문의 조목으로 삼아 먼저 역대 정치의 득실을 말씀하시고, 다음으로 대신이 논의한 것의 가부를 물으시어 지당하게 하나로 귀결되는 의논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들이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니 감히 비천한 회포를 다하여 고결한 물음에 만분의 일이나마 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후한에서는 도시하는 날에 군사를 일으키는 폐단 때문에 군국의 도위를 줄이고 거기의 재관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 말기에 번진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하나, 재물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 할 수 없었다. 당 태종은 신하를 염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얘기할 수 있었는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도리어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정 무제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가 주관하였으니,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비록 이제 삼왕의 법이라도 끝내 폐단이 없을 수 없었을 텐데, 하물며 그 후대의 법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삼왕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는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법이 오래 되고

나서야 폐단이 생겼고 폐단이 생겨도 구제하기 쉬웠습니다. 소위 '황제·요임금·순임금이 일어나 그 변화에 통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게 하며, 신령스럽게 교화시켜 백성으로 하여금 마땅하게 하였다.'고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후대의 임금은 마음을 보존하여 정치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법에 의지하여 정치를 하니, 법에 한번 폐단이 생기면 다시 구제할 수 없어, 마침내 혼란하고 망하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청컨대, 신이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고조(B.C. 206∼195)는 군국에 재관과 기사를 두고, 장안長安에는 다만 남북군의 숫자만 있고, 일이 있으면 우격으로써 군대를 소집하였다가 일이 끝나면 다시 혁파하였습니다. 무제(B.C. 142∼87) 때에 이르러 비로소 남북군의 군사를 군국에게 번상하게 하였지만 장안에는 일정하게 머무는 병사가 없었습니다. 왕망(8∼23)이 찬탈했을 때,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도 위병이 이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적의는 전차와 기병으로서 군대를 일으키고, 또한 광무제도 이통의 계책을 써서 도시都試하는 날을 이용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마침내 한나라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즉위 초에 군국의 도위를 줄이고 거기의 재관을 혁파하였습니다. 그 뒤로 힘센 신하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으나 외방에 의탁할 만한 번진 세력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동탁이 군대를 일으켜 궁궐을 향하고, 원소와 조조가 각각 한 지역에 웅거하여 마치 자기 소유처럼 하였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외방 병력이 강하고 중앙 병력이 약해서 일어난 폐단이 아니겠습니까?

당나라 부병제가 세 번 변하여 번진이 되었는데, 번진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반란을 일으키는 장수와 힘센 신하가 천하에 늘어섰고, 조정의 정령이 미치는 곳이 한 곳도 없게 되어 결국 당나라는 망하였습니다.

오대 말엽의 그 군신들은 모두 번진에서 일어났습니다. 송 태조는 군대에서 지내서 그 사실을 직접 보았으므로 나라를 세운 초기에 왕심기·석수신 등의 병권을 혁파하고, 조용히 술잔을 권하는 사이에 번진의 수백년 폐단을 없애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에서 통제하였으니 잘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쇠약해져 도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왔고, 적들의 기세가 임금이 사는 수도의 코앞에 이를 때까지 무인지경을 달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외방에 충성을 다하여 구원하는 병사가 없어, 마침내 두 황제가 북에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후 자손이 겨우 강좌를 보존하고 끝내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무릇 대신은 임금의 보좌이니, 대신이 존귀한 후에 임금의 세력도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대부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았으니, 어찌 일반 서민들에게 하는 것처럼 경·의 와 같은 치욕스런 형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한 문제는 가의가 조정에서 한 말을 받아들여 대부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았고, 당 태종은 정선과가 죄수 속에 섞여 나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삼품 이상의 대신은 일반 죄수와 더불어 함께 불러들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대신을 예로서 대하는 아름다운 뜻이나, 그 말류의 폐단으로 주아부·소망지·유계·장량 등이 원망을 품고 죽어 갔습니다. 어느 때는 대신으로 하여금 아무 하소연도 못하게 하고, 어느 때는 귀한 신하로 하여금 불려와 정황을 설명하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그 잃는 것이 또한 많습니다.

정권은 임금의 큰 권한이니 하루라도 남에게 빌려 줄 수 없습니다. 전한 말에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여 태아를 거꾸로 잡아, 왕망이 끝내 작은 국량과 하찮은 재능으로 한나라의 정을 몰래 옮겼습니다.

광무제가 그 폐단을 통렬히 경계하여 삼공의 권한을 없애고 정권을 대각에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신하로 하여금 머리를 움츠리고 방관하게 하는 것은 임금이 대신을 신임하는 뜻이 아닙니다. 정권이 조정에 있으며 천하가 편안하고, 정권이 대각에 있으며 반드시 환관에게 돌아가고, 환관에게 돌아가면 조정이 혼란해집니다. 이것은 광무제가 눈앞의 잘못된 것을 경계하다가 후일의 걱정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군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다스려져 편안해지고, 소인을 등용하면 위태로워져 망합니다. 사람을 쓰는 것은 국가의 큰 권한이니 그 쓰고 버리는 기틀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재상에게 맡기는 것은 괜찮으나, 자격과 이력을 따져 서열을 매기는 것과 같은 자질구레한 일은 재상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니 전조에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역대 임금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재상에게 맡기니 재상이 그 노고를 이기지 못하고, 두 가지 일을 오로지 전조에게 맡기니 전조에 권한이 편중되었습니다. 두 가지가 모두 그 마땅함을 잃었으니 후대 사람의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어찌 괴이하겠습니까?

무릇 이 여러 임금은 모두 삼대 이후에 크게 공적이 있는 군주입니다. 그들이 만든 법이 어느 때는 취할 만할 것이 있으나, 끝내 이제 삼왕의 정치를 이루지 못한 것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데에서 오는 병통이었습니다. 맹자께서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 앞에서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신도 감히 여러 임금의 일을 전하께 아뢸 수 있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다시 한 대신이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가 있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 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사병을 두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기'에 "무기·갑옷·투구 등 병장기를 사가에 보관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임금을 위협한다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신하에게 사병이 있으면 점차 반드시 그 임금을 위협하는 데 이른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고려 말에 대신과 병권을 관장하는 자가 각각 도당을 심어 놓고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통치권을 빼앗아 마침내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우리 조선 초기에도 종실과 대신이 여전히 병권을 관장하였고, 이 때문에 부모 형제 사이가 서로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때문에 공훈이 있는 신하가 좋은 끝맺음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을 겪은 후에 병권을 거두어들이고, 삼군부에 패기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나라에 정벌할 일이 있으면 장수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일이 끝나면 병권은 다시 관에 돌려보내고 장수는 사저에 돌아가니, 바로 옛날에 관리로서 장수를 삼고 백성으로 병사를 삼는 뜻입니다. 어찌 다시 사병을 두어 지나간 잘못을 되풀이하려 하십니까?

대신을 예로 대우하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용'에 '구경으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여, 대신을 공경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진실로 대신은 임금의 팔과 다리로 하늘이 부여한 직위를 같이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대신하는 바이니 그에게 불경할 수 있겠습니까? 고려 때 간사한 소인들이 일을 꾸며 임금을 어둡게 가리고 대신을 천시하고 욕되게 하여, 때로는 먼 땅에 쫓아내거나, 혹 사형시켜 시신을 여러 사람이 보도록 거리에 널어놓았으니, 결국은 갓과 신발을 뒤바꾸어 놓은 꼴이 되었습니다.

공민왕(1351∼1374) 때는 요망한 중 신돈이 권세와 재물을 마음대로 주물러 하루에도 명망 있는 대신을 10여 명씩 쫓아내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유숙을 교살하기까지 하였으나, 훈구대신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한을 삼켰습니다. 이후로 거의 한 해도 거른 적 없이 여러 차례 커다란 옥사가 일어났으니, 대신이 당한 곤란과 재앙으로 입은 불행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에서는 여러 훌륭한 임금님이 대대로 이어, 아랫사람 대접하길 공손하게 하고, 대신을 존경하여 예로써 대하였습니다. 비록 불행하게 죄에 빠지더라도 직접 죄를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써 죄를 정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심문하고 난 뒤에 의금부에 내려 다스리게 하되, 수갑이나 오랏줄을 풀어 주고 정실에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날에 대신이 음란하여 남녀 문제를 분별없이 하면 더럽다고 말하지 않고, '유박을 제대로 드리우지 못했다.'고 말하며, 나약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임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나약하다고 말하지 않고, '대신이 거느리고 있는 아랫사람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뜻이니, 어찌 미리 죄 없이 무고함을 입어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정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때는 권신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둘러 강조가 목종(997∼1009), 정중부가 의종(1146∼1170)에게 한 처사에서 보듯이, 나라가 그들의 손아귀에 있고 임금을 바둑이나 장기처럼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이로부터 권력이 아래로 이동하여 임금은 허울 좋은 이름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조일신·김용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권한을 훔치고 농락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고, 임견미·염흥방에 이르면 뇌물이 폭주하고 민전을 빼앗아 이들의 부가 나라보다 많았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의 결재를 받게 해서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게 한 것은 대개 이러한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육조와 여러 관서의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먼저 의정부의 가부를 거친 뒤 승정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승정원은 단지 출납만을 관장하나 미처 의정부에서 의논하지 못한 것은 임시로 아뢰어, 혹 승정원이 가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한두 가지 세세한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중대한 일 같으면 후에 반드시 의정부에 보고하여 알게 합니다. 이러하니 승정원의 권한이 아주 큰 것은 아닙니다.

정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때에는 진양공 최충헌 부자가 4대를 이어서 국가를 제멋대로 휘둘렀습니다. 그 때 정방을 처음으로 만들고, 공공 관청을 개인 것처럼 여겨 젖내나는 자제를 정방의 승선으로 삼고, 당류를 끌어들여 대각에 포열하게 하니, 관직을 임명한 것이 열흘만에 100여 개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정방의 이름은 어느 때는 혁파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었다가 하였는데, 그 말세에 이르러 먹과 책으로 정무를 처리한다는 비난을 받기에 이르니 그 외람됨이 극에 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정방을 설치하지 않고, 문무 관직을 선발하는 일을 모두 이조와 병조에 맡긴 것은 이런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관리를 선발할 때 하는 일은 여러 관청의 공로와 잘못을 고찰하여 자급을 올리고 내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의정부의 한 사람이 관리를 선발하는 관직을 겸하여 전체를 총괄하여 이조와 병조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록 작은 일이라도 감히 전조에서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모두 아뢰어 처리하고, 큰 일은 모두 의정부의 의견을 들어 처리합니다. 따라서 전조의 권한이 막중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어찌 정방을 다시 설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아! 국가는 한 사람으로 주인(임금)을 삼고, 임금은 한 마음으로 주인을 삼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국가를 보면 국가는 지극히 크고 한 사람은 지극히 작아, 작은 것으로 큰 것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한 마음으로서 국가를 보면 국가가 비록 크지만 임금의 마음이 오히려 크므로, 큰 것으로 큰 것을 움직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하니 천하와 국가라는 큰 것을 가진 사람이 그 마음을 크게 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 밖으로 표현되기 전에 본심을 보존하고 기르며, 바야흐로 싹트는 때에 마음을 살피면, 온갖 일이 지극히 번잡하더라도 하나하나 잘 다스릴 수 있고, 백관들이 비록 많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씩 부리는 이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어느 것인들 임금님 마음으로 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요·순임금이 삼가고 두려워하며, 탕왕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문왕이 공경하고 삼간 것이 모두 이 마음입니다.

아아! 이 마음을 잡으면 보존하고 버리면 없어지나니, 마음을 보존하고 기르지 않을 수 없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 앎을 지극하게 하는데 마음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학'에서는 이 마음으로 국가와 천하의 기틀을 삼았고, 동중서는 이 마음으로 조정 백관의 근본을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이제 삼왕의 마음으로 전하의 마음을 삼으면, 이제 삼왕의 정치를 이룰 수 있고, 앞의 네 가지 법에서도 한·당 이후에 있었던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법을 고쳐야만 지극한 정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의 법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공자께서 "이 나라에 살면서 함부로 대부를 그르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니, 신이 대신의 계책에 대하여 어찌 감히 가볍게 의논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임금님께서 하문하셨으니 신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그대 대부들은 사책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의 변변치 못한 학식으로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마는, 혹 망령되게 지난 일을 들은 바 있고, 혹 망령되게 오늘날 폐단을 본 바 있으니, 어찌 한두 가지 아뢸 수 있는 것이 없겠습니까? 짧은 시간이라 마음에 품은 바를 다하지 못하고 대략 대답하여 황공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전하께서 재량하옵소서. 신이 삼가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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