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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비 글

묘향산소기<박제가>

by 싯딤 2008. 7. 22.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는 초정楚亭 박제가가 지은 장문의 기행문이다.

이 글은 박제가가 20살 때 장인 이관상李觀祥이 영변도호부사로 부임하여 가던 길에 따라 가던 중 지었다. 장인의 후광으로 동행이 적지 않았고 이 때 기생과 악동까지 동원한 왁자지껄한 행차였을 것이다.

<묘향산소기>는 그 표현이 아름다워 눈에 선하고 손에 잡힐듯한 명문이다. 박제가의 문집에는 실려 있지 않고 북한에서 1964년 간행한 <기행문선집>에 원문과 번역이 실려 있다.

 

<박제가의 초상>


 

<박제가의 목우도牧牛圖.소타고 가는 아이의 모습과 평화로운 봄날 풍경이다>

 



 

박제가 <朴齊家, 1750~1805>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차수次修, 재선在先,호는 초정楚亭.

승지承旨 박평朴坪의 서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18세기 북학파北學派의 거장이다. 중국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본받아 생산 기술을 향상시키고, 통상무역을 통하여 이용 후생利用厚生을 실현할 것을 역설하였다.

출생에서부터 신분적 차별을 받았으나, 일찍부터 詩·書·畵로 명성을 얻었다. 19세 무렵부터 북 학사상의 선구적 인물인 박지원朴趾源을 스승으로 따르며,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 북학파 들과 서울에서 가까이 살면서 사귀었다. 29세 때(1778) 청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된 정사正使 채 제공蔡濟恭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연경燕京에 가서 건륭시대 청조淸朝 문물을 접하고, 이조원·반 정균 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대표작 <북학의北學議>는 청나라에 가서 보고 들은 견문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으로 우리의 사회적 폐단을 성찰하고 농기구·수레 등 기구의 개량 과 사회제도의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듬해 정조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에 따라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그 후 규장각에서 많은 책을 읽고 정약용과 같은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었다. 37세 때(1786)는 왕명에 따라 올린 구폐책救弊策의 상소에서 신분 차별의 타파와 상공업 장려를 통해 부강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41세 때(1790) 황인점黃仁點을 따라 두번째 청나라 연행燕行길에 오르고, 돌아오는 길에 원자(뒤의 순조)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압록강에서 다시 세번째 연경에 파견되었다. 1794년에는 춘당대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798년 나라에서 왕명으로 널리 농서를 구하자, <북학의>를 간추려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를 올렸다. 순조 원년(1801) 네번째 연행길에 올랐고, 돌아오자마자 흉서사건凶書事件의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이라는 이유로 종성 鍾城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그의 글씨는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높은 품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으로 문인화풍의 산수·인물화와 생동감 넘치는 꿩과 물고기 그림을 잘 그 렸으며〈대련글씨〉〈목우도牧牛圖〉〈어락도漁樂圖〉〈야치도野雉圖〉 등이 전한다. 저서로는 <정유집貞否集> <북학의> <정유시고貞否詩稿> <명농초고明農草稿> 등이 있다.

 

***

 

묘향산소기 妙香山小記

 

박제가

 

내가 철옹(맹산)에 나그네 된 지 석 달 되던 때 유혜보(유득공)가 내게 보낸 글 가운데 “족하('귀하'비슷한 존칭 대명사)의 지금 가 있는 곳에서 바로 서쪽에 묘향산이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였기에 나는 “한더위는 이미 갔으니 단풍철을 기다려 묘향산 구경을 꼭 가겠다.”고 회답하였다. 또 무관(이덕무)은 내게 이런 시를 보냈다.

단풍이 한창일 제 향산엘랑 들렀다가

어서 빨리 돌아와서 그린 회포 풀어 보세.

가을 9월이 되었다. 벌써 기러기도 울어 옌다. 날 밝고 서릿발 상쾌한 13일에 동으로 향산 길을 떠났다. 초록 도포에 자줏빛 나귀, 허리에는 검이요 안장에는 책이다.

북산이 끊어진 언덕과 동대의 높은 석벽(약산. 철옹에서는 서쪽이지만 옛날 영변에서는 동쪽인 까닭으로 동대라 함.)이 서로 어울려 수문 길을 이루었다. 대개 계곡의 형세가 마치 다른 진흙이 스스로 터져 버그러진 듯 양편이 서로 어긋어긋 대치되었으며 시내가 그 사이를 그어 흐르고 있다. 시냇가에 널린 돌들은 모두 하얗게 분장을 하였으며 쳐다보니 높은 누각에는 ‘음박’이라 쓴 현판이 붙었다. 동으로 60리 석창에 이르렀다. 해는 아직 석양이지만 나는 여기서 자기로 하였다. 창 앞에는 시내가 잔잔히 흘러 곱게 고인 물이 맑다 못해 새파랗고 시내 위에 각색 나무들이 산에 의지하여 오로지 이 촌집을 위해 단장하였으니 내 어찌 그저 지날 수 있으리!

새벽에 일어나 등불을 돋우고 원중랑 (중국 명나라 때 시인 원굉도, 서문장 중국 명나라 사람 서위, 문장과 서화를 잘함.)의 전기를 읽고 있었는데 이몽직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밤은 깊었구나. 이 시냇가에 모두들 와서 자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나는 이 말에 동을 달았다.

“달빛은 지붕에 흐르고 있거늘 꿈 어이 집 안에서 꾼단 말인가.”

또 이어

“얼굴을 잦히니 깨끗한 이슬 기운, 귀에 들리는 건 쌀쌀한 가을 소리, 제군이 여기서 잠 못 이룰 줄 또 어찌 뜻하였으랴!” 하였다.

14일.

석창에서 새벽밥 먹고 떠났다.

천수대는 둥그레하여 작은 섬같이 길가에 얌전히 앉아있다. 잘쑥 잘린 고개턱은 어깨가 끼일 듯,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은 무릎을 넘는다. 새벽빛이 처음 걷히니 단풍 빛은 빨간 물이 뚝뚝 듣는가 싶고 말발굽은 자라같이 하얀 모래 위에 인을 찍으며 나간다.

여기로부터 동으로 점점 긴 수풀이 벌려 서고 역촌에서는 연기가 오르며 다섯 그루 전나무가 산이마에 우뚝우뚝 서 있는 것이 은은히 보이니 거기가 이른바 사절정이 있는 데다 뒤 언덕에산등성이가 잘린 고개턱에는 반드시 고목나무가 서 있으며 그 아래는 돌들을 모아 놓았다. 까마귀, 수리개 들이 물어 온 뼈다귀를 쫓다가 떨어뜨리고는 고목나무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있는데 거기에는 촌 무당이 너펄거리며 와서 나뭇가지에 잔뜩 걸어 놓은 종이 나부랭이와 오고 가는 행인들이 이것을 성황나무라 하여 걸어 놓고 간 해진 신짝들도 있다.

어천령을 넘어 석양녘에 향산천을 건넜다. 자욱한 띠풀과 갈 들은 싸각싸각 마른 소리를 내며 간들거리고 있다. 냇가의 돌바탕에서는 사람의 발걸음에 돌들이 달각달각 서로 갈리고 있다. 그중에서 얄팍한 돌들을 골라 가지고 몸을 나직이 비켜서서 물 가운데를 향하여 팔매를 갈겨쳤다. 돌은 물껍질을 벗기면서 세 번도 뛰고 네 번도 뛰어나간다. 느린 놈은 두꺼비처럼 덥적거리다가 빠지고 가벼운 놈은 날래게 제비처럼 물을 차며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놈은 우연히 수면에 참대를 그리면서 마디마디 연장되어 나가기도 하며 혹은 돈을 다금다금 던지듯이 찰락찰락 끝을 채며 인을 찍어 나가니 뾰족한 흔적은 뿔 같고 층층한 파문은 탑 같았다. 이것은 아이들의 놀음이다. 물결이 겹겹이 수면에 움직이는 것을 ‘겹 물놀이’라 한다.

도중에는 이따금 허술하여 단풍도 그리 곱지 못하고 산도 그리 빼나지 못한 데도 있다. 흙이 많고 돌이 적어 뭉실뭉실하니 대개 변두리에 가까운 데가 그러하다.

이색의 기록에는 “묘향산은 압록수의 남쪽 언덕, 평양부의 북쪽에 있어 요양과 더불어 경계가 되어 있다. 산의 크기로 이와 비교할 것이 없으니 장백산에서 갈린 것이다. 산에는 향나무가 많으며 도교와 불교 등의 고적들이 있다.”고 하였다. 상고해 보면 묘향산은 압록수를 상거하기 수백 리 밖이며 평양도 또한 그렇다. 그러면 이색의 말이 너무 틀리지 않는가? 지금 압록수의 상류가 강계부를 거쳐 흐르고 있으니 묘향산과 더불어 좀 가깝다고는 할지언정 그 외에는 다 떨어져 있는 산골짜기로서 산삼의 산지이다. 이것이 발해에 속했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요와 더불어 경계하였다면 의주나 용천이 그럴 것이다. 혹자는 향산의 일명이 태백인바 지금의 압록강 밖에 있으며 단군이 처음 강림한 땅이라고 함은 다만 억지로 끌어 붙인 것이라고 한다. 문헌에 이를 증험할 것이 없고 경계를 밝힐 수 없다. 그러면 지금의 압록수라는 것을 또 어찌 믿겠는가.

강을 임하여 열린 향산의 동구는 서쪽으로 꺾어 들어갔으며 비로봉의 절정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하늘을 찌르고 서 있다. 가지각색 나무들은 빛을 자랑하여 가을 단장이 한창인데 길을 좇아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침침한 산기운은 마치 굴속에나 들어가는 듯하며 길가에 널린 돌들은 기러기 떼가 앉은 듯, 바둑돌을 흩어 놓은 듯하였다.

동구에서 보현사까지 대개 십 리 길이다. 보현사는 고려 때 탐밀이 그의 제자 굉곽과 함께 창건한 것이다. 김양경의 시에는 이런 것이 있다.

절이 헐어 중수하기 한 번만 아니어라.

봄날의 뭇 새들도 예를 느껴 지저귀네.

봉우리 사면으로 몇천 겹 둘렀는고.

전당의 절반은 새로 되어 삼백 칸은 되오리.

터 잡은 규모는 탐밀의 도량이요

속세 떠난 풍경은 향산의 품이어라.

알지어다 부처의 힘 오랑캐도 항복하여

풀 푸른 들판에는 전마들이 한가롭다.

보현사 안에는 패엽(종려의 일종인 패다나무의 잎. 인도에서 많이 나며 잎으로 종이를 만듬. 옛날에는잎에다 불경을 씀)으로 만든 둥근 부채가 있다. 패엽의 지질은 이미 다 벗어졌고 그 줄기는 건훤의 등뼈 같으며 그 자루는 머리카락을 땋은 것 같은데 일찍이 서산 대사가 가졌던 것이라 한다. 또 지팡이 머리에 금으로 불상 둘을 새겨 붙였는데 역시 서산 대사의 지팡이라 한다. 서산이 매양 사람을 만날 적마다 지팡이를 짚고 절을 하였는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은 부처에게 절한 것이니 그의 자존함이 이와 같았다. 또 직경이 한 치나 되는 구슬이 있어 광채가 거울 같은데 태가 간 얼음처럼 금이 있어서 물건을 비추면 거꾸로 나타난다. 또 녹용같이 생긴 뼈다귀가 있는데 이는 서방 부처의 어금니라 한다. 관음전에 들어 자는데 베개 가로 울려오는 경쇠 소리에 문득 잠이 깨어 한 벗에게 부치는 글을 썼다.

외로운 등불 고요할 제 범패 소리 울린다. 돌 시내는 좔좔, 나무숲은 더북더북, 달빛은 뜰에 찼는데 누각은 말없이 섰구나! 이때 나는 외로이 앉아 홀로 생각하노라. 온갖 새들은 제각기 나무에 의지해 깃들어 자거늘 날리는 서릿발이 둥지를 엄습하니 그 깃이 응당 차리로다! 새들도 오히려 심란하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15일,

조반 후에 길잡이 중을 데리고 담여에 올라앉아 동으로 떠났다. 김현중은 이런 말을 한다. “영변 사람은 글도 많이 알고 시도 잘한다.”고. 그 시로는,

우발에 봄 깊으니 버들 꽃 날리고

단림에 가을 늦어 난초 향기 쇠잔쿠나.

시왕전 으슥하니 중생들 의혹하고

만세루 높은 데는 세월이 길었구나.

....

(나머지는 전하지 않음.)

옛날 행인국이 지금 보현사 있는 데였다고 한다. 고구려 동명왕이 그의 장수 오이, 부분노를 보내어 이를 치니 행인 왕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서 석굴에 숨어 있다가 부분노에게 사로잡혀 항복하였다 하여 그 굴을 국진굴이라고 한다. 그 굴은 겨우 앉을 만할 뿐으로 석실처럼 되었는데 보현사 좌편에 있다.

무릉폭은 깊은 골짜기에서 음침한 소가 되고 거기서 넘쳐 나와 바위 위를 흘러 떨어진다. 그 근원까지 찾아 올라가 앉은 나는 물이 나무 밑은 뚫어 나가는 광경을 굽어보았다. 이는 폭포를 보는 한 개의 특이한 방법이다. 나는 드디어 시 한 수를 쓰고 돌아왔다.

발자취 소리를 서로 들어가면서

자옥한 골 찾아들어 쳐다보니 파란 하늘 기러기 떼 날아간다.

백 척 높이 쏟는 폭포 바위 걸쳐 꿈틀꿈틀

한 발만치 솟은 해는 사람 향해 붉었구나.

이리저리 나무 막혀 앞선 중도 안 보이고

아쉬울 손 구름 깊어 갈 길은 어데인고.

두어라 절정엘랑 구태여 가지 말자.

폭포 근원 보았으니 돌아갈 길 바쁘도다.

문득 서산 대사의 향로봉 시가 생각난다.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 둑만 같구나.

세상의 호걸들은 초파리와 같아라.

온 창에 달빛 든 제 청허의 베개 가엔

한없는 솔바람이 그 운율도 갖가질세.

서산 대사의 이름은 휴정인데 그는 동방 불가의 스승이다. 임진왜란 때 그는 향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이여송 제독은 그의 의기에

감동되어 시를 써서 그에게 주었다.

공명 이욕 뜻이 없고 선도에만 전심터니

나라일 급함 알고 총섭 그가 하산했네.

 

혜환 거사(이용휴)의 묘향산 유람 가는 사람을 보내면서 지어 준 시에는 이런 것이 있다.

묘향산을 비긴다면 묘고봉과 같다 하리.

신령한 사적, 기이한 자취 도처에서 보리로다.

나한이 가오실 제 흰 사슴 두었으니

쌍쌍이 꽃 아래서 새 녹용 자란다네.

담여의 멜빵은 삼으로 엮어 만들었으며 그 멍에목은 등을 휘어서 만들었다. 담여를 메는 법이 길이로 서서 메는 것이고 옆으로 갈라서지 않는다. 그리하여 앞의 사람은 끌고 뒤의 사람은 따라간다. 꼬부라진 길에도 잘 들어갈 수 있음은 멜빵이 길기 때문이며 언덕에도 잘 오를 수 있음은 앞사람을 믿기 때문이다. 앞이 들릴 때에는 앞을 늦추고 뒤를 들며 숙을 때에는 앞을 들고 뒤를 늦춘다.

기울면 팔로 조절하고 발을 맞추는 것이다. 이리하여 교자가 항상 안정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굽어보아 멘 사람의 어깨가 홈처럼 자리가 나고 등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게 될 적마다 가끔 쉬게 하였으니 차마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고목이 절벽에 의지한 채 말라 버렸는데 우뚝한 것은 귀신의 몸뚱이 같고 움츠린 것은 잿빛을 띠였으며 껍질을 벗은 것은 늙은 뱀이 매달려 허물을 벗은 것 같고 대머리로 된 것은 병든 수리개가 웅크리고 돌아보는 것 같다. 그리고 배는 패워 어웅하며 곁가지는 하나도 없다. 산을 의지한 돌은 검고 길에 깔린 돌은 희고 시내에 잠긴 돌은 청록색을 띠었으며 빨래터와 건늘목에는 돌이 닳아져서 핥은 것같이 불그레한 윤이 나고 미끄럽다. 멀리 단풍 사이로 비단 필 같은 가을볕이 펼쳐 드니 냇가의 모래들이 모두 누른빛인가 의심하였다.

중의 찬거리로서 솔 껍질로 만든 포는 청어 살 같고 소금에 절인 더덕은 물고기 말린 것 같고 고추장은 새우알젓 같고 탁주는 우락 같았다.

사리각에 들어가서 불화(부처들의 그림)를 구경하는데 어린 중이 긴 살대 끝에 살촉처럼 종이를 싸매 가지고 부처의 그림과 부처의 사적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외듯이 해설하여 주는 것이었다. 그 말이 심히 자상하고 민첩하므로 여럿의 시선이 모두 그에 끌려 그림은 보지 않고 중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나이는 십여 살 되었겠고 깎은 머리는 자라나서 까맣게 이마를 덮었으며 우리를 향한 그의 혀끝이 나불나불 끊임없이 재깔거렸다.

한나절쯤 되어 금강굴을 넘었다. 금강굴은 바위가 덮여 움집처럼 된 것이다. '아' 하고 입을 쩍 벌린 것 같은데 잠시 들어섰노라니 머리가 인 것 없이 무거워짐을 느끼게 된다. 부처는 짓눌리는 것을 두려워함도 없이 오히려 그 가운데 의연히 앉아 있구나! 어떤 이는 지팡이를 거꾸로 잡고 천장을 떠밀어 본다. 그 동정을 시험하자는 것이다. 돌은 비록 믿을 수 있다 해도 나는 차마 못하겠다. 높이는 서울 창의문 뒤에 있는 불암에 비할 만한데 좀 더 넓어 그 창을 터친 정도이다.

토령을 쳐다보니 5리나 되겠는지. 잎 진 단풍은 가시와 같고 흘러내린 돌 자갈은 길에 널렸다. 뾰족한 돌이 낙엽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발을 딛자 삐어져 나오니 나는 미끄러져서 거의 자빠질 뻔하다가 일어났다. 그래서 손으로 진흙을 짚었으니 뒤 사람의 웃음거리로 될까 부끄러워 일어날 적에 얼른 단풍잎을 하나 주워 들고 천연스레 그들을 기다렸다.

만폭동에 앉으니 저녁볕이 사람을 비춰 준다. 웅대한 바위가 고개를 이루었는데 긴 폭포가 이를 넘어 흐른다. 물줄기가 무릇 세 번 꺾이고야 비로소 밑으로 떨어져 바위 뿌리를 짓씹는다. 떨어지는 물줄기가 못 속으로 움푹하게 자리를 내며 들어갔다가 다시 솟구쳐 일어날 때는 고사리 움이 떨기로 주먹을 쥐고 나오는 것과도 방불하며 혹은 용의 수염같이도 되고 혹은 범의 발톱같이도 되며 무엇을 움킬 듯하다가 스러지곤 한다. 뿜는 소리와 함께 내려 흘러 서서히 넘치다가는 주춤하고서야 다시 또 헤쳐 나가니 마치 숨을 헐떡거리는 것 같다. 가만히 한참 듣고 있노라면 내 몸도 또한 이와 더불어 호흡을 같이하게 된다. 이윽고 잠잠하여 소리 없는가 하면 다음엔 더욱 세차게 소리친다.

바지를 걷어 정강마루까지 추켜 붙이고 소매는 걷어 팔꿈치 위에 올려 밀고 수건과 버선을랑 벗어서 모래판에 내던진 후 둥글넙적한 돌로 엉덩이를 고이고 잔잔한 물 가운데 발을 딛고 걸터앉았다. 잠길락 뜰락 하는 작은 나뭇잎은 배는 자줏빛인데 등은 노라며 돌을 싸고 엉킨 이끼는 곱기가 미역과 같다. 발로 물을 쭉 베었더니 폭포가 발톱에서 일어나고 입으로 물을 물어 양치질을 했더니 비가 이빨에서 쏟아졌으며 두 손으로 물을 허우적거리니 물빛만 번득일 뿐 내 그림자는 없구나. 눈곱을 씻으며 얼굴의 술기도 깨우는데 때마침 가을 구름 한 덩이 물에 비치며 나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는구나.

각 종 나무들이 한 가닥 계곡 길을 끼고 섰는데 멀리 보이는 하늘은 바로 폭포 위에 있어 목만 늘인다면 하늘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여기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위 형세는 펀펀하게 넓어지며 어지러이 흐르는 물은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여러 사람들은 아래서 내가 떨어질까 걱정하였으나 말리지 못한 그들은 나를 바라볼 뿐 올라오지는 못하였다. 나는 한 걸음 더 올라 머리를 돌려 보니 손짓하며 부르는 손과 입들을 역력히 셀 수 있었고 다섯 걸음 뒤에 머리를 돌려 내려다볼 때엔 아직도 나를 향해 쳐든 얼굴의 눈썹 언저리까지만 보였고 열 걸음 뒤에 돌아볼 때엔 다만 갓의 평면만이 가물거릴 뿐이었다. 나는 100보쯤 더 올라가서 다시 돌아보았더니 멀리 떨어진 동구의 사람들이 폭포 밑에 와 앉은 듯이 보이고 나를 보낸 폭포 밑의 사람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거친 수풀엔 길이 끊어지고 석양도 또한 낮아졌다. 나는 문득 호젓함을 느끼며 스스로 걸음이 바빠졌다. 덤불 속을 헤치며 나가게 되니 밀려갔던 회초리는 얼굴을 때리고 엉켰던 곁가지는 옷을 찢는다. 쌓인 낙엽 속으로 샘이 스며 흘러 무릎이 빠지는 진창으로 되었다. 그러더니 진창이 끝나고 폭포의 근원이 나타났다. 맑은 샘 잔잔하여 소리 없이 돌부리를 감아 흐른다. 북으로는 큰 골짜기가 졌는데 휑하고도 그윽하다. 울긋불긋 곱게 물든 나무들이 골에 차 있을 뿐 다른 아무것도 없다. 그 건너로 향로 상봉이 지척에 우뚝 솟아 금시에 건너 오려는 듯하다. 공중의 길로는 한 개의 다리로 가히 통하련만 가깝고도 멀어 선범9)이 갈린 양 아득히 바라만 볼 뿐 갈 수는 없으니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오게 되었다.

대략 돌의 생김새를 말한다면 배를 내놓고 있는 무슨 거물 같아서 앞가슴까지 헤쳤는데 아래는 부르고 가운데는 질룩 들어가 두어 주름이 배꼽에 가로질렀다. 내가 올라간 데는 소의 두 뿔 사이의 이마 위 같은 데다. 아지 못게라! 돌이 생길 적에 그 속이 비어 독을 엎은 것같이 되었는가? 또는 철저한 통돌로 되었는가? 쳐 보면 어찌 그리 굳으며 불러 보면 어찌 그리 울리는고! 샘 근원은 크지 못하여 처음 나오는 것은 띠폭만 한 정도이다. 그것이 돌을 빌려 소리를 내며 뭇 샘을 모아 마침내 그 끝에 가서는 위대한 형세로 발전하니 이는 대자연의 힘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처음 올라올 적에 중 하나가 따라오다가 돌아갈 길을 일러 주었다. 내려와 보니 일행이 모두 이미 가 버렸고 오직 담여만을 동구에 두어 타고 가게 하였을 뿐이다. 나는 걸어서 이미 퇴락한 가섭암을 들러 돌 틈을 더위잡아 서쪽으로 단군대를 넘었으니 남보다 십 리길이나 더 걸었다.

단군굴을 너덧 길이나 되는 바위가 터져 서 있는 것인데 마치 큰 독을 쪼개 세운 듯이 배가 어웅하니 비고 머리는 빠르며 틈으로 하늘을 엿보고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단군이 하강한 데라고 세상에서 전하고 있다. 문헌에 이른바 ‘단목수 아래’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하며 또 단목수가 그 위에 무성하였다고 전하는데 사면으로 찾아보아도 그것은 볼 수 없고 다만 비로, 향로 두 봉우리에 곧추 자라 올라 허공을 찌르고 있는 것이 향목이라 한다.

퇴락한 암자가 굴에 의지하여 거의 어깨를 가지런히 하고 있는데 멀리 보면 마치 비둘기장이 달린 것 같다. 암자에는 바위가 냉기를 불어 사람을 엄습하기 때문에 중이 거처하지 못한다고 한다.

단군대는 굴의 서쪽 산꼭대기에 있다. 이 산발 하나가 마치 올챙이 모양으로 되었는데 여기서 사방을 굽어 돌아보면 큰 바다의 외로운 섬 같기도 하다. 바람은 나뭇가지를 희롱하고 기생은 춤을 추는 것이었다. 만좌가 이미 취하였고 흥을 실은 거문고 줄은 바야흐로 바삐 울었다. 먼 산에는 벌써 저녁 빛이 깃드니 좌중이 서로 추워하는 것을 보며 가기를 서둘러 내 지팡이, 내 신 하면서 덤비었다. 절을 향하고 일어나 저녁연기를 바라보며 내려올 적에 사람의 무릎은 이미 짙어진 어둠 속에 묻혔으되 넘어가는 햇살은 아직도 단군대 이마 위에 한 치는 걸려 있다. 대개 여럿이 말을 타고 갈 때에는 남의 뒤가 되기를 싫어하나니 앞선 말발굽에서 먼지가 날리기 때문이며 산에서 내려올 적에는 앞설 것이 아니니 뒤 사람의 신코가 위태로운 돌을 차기 쉬운 까닭이다.

천주석이 거인같이 우뚝 일어나 중 모습을 하고 멀리 서편 봉우리에 섰다. 아침에는 노상에서 중이 가리켜 초대면을 하였더니 저녁에 그 앞을 지날 적엔 그 두 눈이 먼저 나를 반겨 맞아 준다. 담여를 멘 중이 다 고개를 들어 그것을 바라보며 먼 길을 알려 주는 후인10)이라고 하였다.

극락전을 들여다보니 침침한 등불이 그윽이 푸르고 장경 고각11)은 기와 줄이 아리송하며 밭머리에는 삼대가 허옇게 서서 얼씬거린다. 늙은 중들이 나를 맞아 절하며 각각 은근한 정을 보내 준다. 아침에 그들은 보고 저녁에 그 절에 돌아와 보니 한 번 본 얼굴이 어찌 그리 다정한지 옛날 친구를 대하는 듯하였다. 극락전은 보현사에 속하였다.

중 금환과 더불어 법화경에서 더불어 화택의 비유를 토론하였다. 그는 나이 50여 살이다. 입으로는 불경을 잘 외면서도 사람에게 의문을 잘 해명하지는 못한다. 그의 형 혜신도 또한 중으로서 극락전에 있는데 불경의 연구가 금환보다 훨씬 낫다고 한다. 나는 금환과 이런 문답이 있었다.

“중노릇이 즐거운가?”

“자기 일신을 위해서는 편합지요.”

“일찍이 서울을 가 본 일이 있는가?”

“한 번 서울을 갔었는데요. 먼지란 먼지는 휘날리고 또 복잡해서 나는 못 살 데만 같았습니다.”

“대사는 지금이라도 환속할 생각은 없는가?”

“열두 살에 중이 되어 빈 산중에 홀로 지내 온 것이 40년이나 되었는데요! 이전에는 남에게 수모나 받게 되면 그래도 분도 나고 스스로 자기를 가엾이도 보았더니 지금은 이미 칠정(불가에서 말하는 일곱가지 정)이 다 말라 버렸습니다. 비록 속인이 되려 해도 될 수도 없거니와 속인이 된다 해도 무용지물이 아니겠어요! 시종일관 부처님께 의지하다가 입적할 것뿐이옵지요.”

“대사는 처음에 왜 중이 되었는가?”

“그야 만일에 자기가 원심(신앙심)이 없었다면 비록 부모라도 억지로 중노릇을 못 시킵니다.”

이날 밤 보름 달빛은 비단결 같았다. 탑을 서너 바퀴 돌고 술도 한 순배 하였는데 멀리 나뭇잎에서 오는 소리 쏴 하여 무엇을 쏟는 것도 같고 쓸어 내는 것도 같았다.

만세루로 해서 대웅전에 들어가니 종이 등의 불빛은 환하고 금불은 빛났다. 집은 사치하게 꾸몄으나 속되며 그림은 엉뚱하게 그렸으나 잡스럽다.

노승이 불상 옆에 시립하였는데 가사는 발에 끌리고 백납(중이 쓰는 모자)은 이마를 덮었으며 얼굴의 주름살은 눈썹 언저리, 턱, 귀밑 사이로 얼기설기하고 깎은 머리의 흔적은 거뭇한 수묵색을 띠었다. 살펴보니 사람이 아닌 목상이로구나! 좌우에 서 있는 금강신은 이빨은 성 위에 돌려 막은 성가퀴 같고 혓바닥에서는 불꽃이 일어나고 옷이 벗어진 몸뚱이는 비늘 같은데 거기서 뱀 귀신이 쑥쑥 나오고 있는 것을 형상하였다. 몰골이 얼른 보아 위엄차다고도 하겠지만 좀 바라보노라면 곧 장난거리로 보일 뿐이니 나는 이것으로 보아 위풍이란 것은 덕망에 있는 것이지 모양에는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16일.

안내자를 따라 단군대 서편에 있는 상원암으로 갔다. 서부도(안심사)는 탐밀이 처음 건축한 것이다. 거기에 나옹 옛날 비석이 있는데 비각을 세워 그것을 덮었다. 글자가 떨어지고 터져 깨진 사기처럼 되었으니 겨울에 불을 지르고 탑본한 까닭이라 한다. 그 외에도 많은 비석들이 비각 뒤에 여기저기 서 있는데 새길 때 글자의 잘못도 적지 않다. 비석 밑에 누운 거북은 눈이 멀었으며 머리에 틀고 앉은 용은 다리가 떨어졌다.

읽고 만지작거리면서 고적이라고 아낀다. 나는 일찍이 옛일이란 어떤 것이건 매양 찾을 데 없음을 한하여 오던 터이다. 이제 가을 산 조각들이 거친 풀, 찬 이슬 속에서 옛일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옛것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를 대하여 서글프고 심란해서 저축저축 머뭇머뭇 오랫동안 가지를 못하는고! 빈산, 떨어지는 해, 끊어진 다리, 흐르는 물, 이는 예로부터 최고의 정서를 하염없이 자아내는 곳이로구나!

만폭동 길에는 우족대가 있다. 나는 그것이 소발 같은 점을 발견 못하였다. 안심사 뒤에는 이폭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항아리 같으니 항폭이라는 것이 좋을까 한다. 금강산에 있는 세두분洗頭盆에 손 흔적이 있다는 것과 여강에 있는 용마석의 채찍 자리에서 피가 흐른다는 것이 다 주어 댄 명칭일 뿐이다. 전하는 자는 그것과 몹시 가깝다고 이름한 것이언만 듣는 자가 꼭 그렇다고 하여서야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

인호대의 길은 바위의 한편 등성이로 났다. 마치 전복 조개비를 엎은 것처럼 되었는데 사람이 조개비 구멍으로 통해 다니는 셈이다. 또 어찌 보면 그 등성이가 목을 옴츠린 새의 날갯죽지와도 같아서 길은 그 도드라진 곳에 걸려 있다. 왼편 발 아래로 내려다보면 휑덩그러니 천야만야 내려 빠졌다. 거기에 나무숲이 총총히 끝을 뽑고 들어섰는데 겨우 그 초리만을 내려다볼 수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는 아실아실한 벼랑을 거쳐야 한다. 바위 벼랑에 걸어 늘인 쇠사슬을 잡고 무릇 30여 줌을 타 올라야 비로소 길이 나오고 쇠사슬이 끝나게 되며 위험한 고비를 벗어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는 바위에 뿌리를 서려 박고 있는 마른 대추나무를 안고 돌아야만 완전히 언덕 위에 올라 숨을 내쉬게 된다. 옛날 자국눈이 왔을 적에 범이 걸어간 발자국을 따라 이 길을 통하였다 하여 인호대라는 명칭을 붙였다 한다.

법왕봉을 바라보니 바위들이 모두 말쑥하여 가파르게 생겼다. 봉우리 밑에 암자가 있고 암자 앞은 계곡으로 되었다. 법왕봉에서 내리는 물이 이 계곡으로 쏟아지고 있다. 계곡의 모양이 삼태기 같아서 뒤는 들썩하고 앞은 벌어졌는데 계곡에 소리개가 떴을 때 오직 그 잔등만을 보게 되니 계곡이 얼마나 깊은가를 짐작할 수 있다. 폭포가 석벽 위에서 뛰어 떨어지고 있어 물줄기가 벽에 붙지 못하고 방울방울 깨어지니 비도 같고 싸락눈도 같이 흩뿌린다. 멀리 보면 흰 비단 필이 걸려 공중에서 흔들거리는 듯하다. 물 밑의 돌은 조각조각 깨진 먹 조각 같고 확에 떨어져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는 아득하여 분명치 않다. 물이 봉우리에서 떨어지는 것은 천신폭天紳瀑이라 하고 계곡의 것은 산주폭散珠瀑이라 하니 이를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계곡의 오른편에 폭포가 고인 물을 용연이라 한다.

용연폭은 사람에게 비긴다면 오른편 어깨에서 나와 오른편 젖가슴 옆에 물이 고이는 것이다. 나는 폭포를 바라볼 때 오른편 팔회목처럼 된 바위틈에 끼어 섰더니 바위가 내 머리를 가렸다. 대개 폭포 밑의 절구의 확 같아서 물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지 둥글고 새까마니 소리가 없다. 여기서 넘쳐 나온 것이 아까 우리가 건너온 시내의 하나이다.

일설에 용연이 옛날에는 산상에 있었는데 중이 용을 저주하였더니 용이 산을 째고 내려와 턱을 축 처뜨리고 꿇어 엎드렸다. 중이 계속 저주하였더니 용은 또 수십 보를 더 내려가 엎드렸다. 그제야 중이 턱을 끄덕끄덕하였더니 용이 지금의 폭포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상원암 중이 5월 5일에 시루에 떡을 쪄 가지고 시내 돌 위에 놓고 암자에 갔다 와 본즉 떡시루가 간 곳 없었다. 중은 놀라 부처에게 공양을 못하게 되었으니 살아 무엇 하랴 하고 스스로 몸을 못에 던졌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못 속이 명랑하고 궁전이 으리으리한데 푸른 옷 입은 백발 노인이 ‘객은 어데서 왔는가?’ 하고 물으므로 중은 그 연유를 고하였다. 노인이 날카로운 소리로 동자를 불러 ‘아까 떡시루를 가져오라.’ 하였다. 그리하여 동자는 시루 하나와 떡 두 개를 반환하였다. 중은 이것을 받아 떡은 소매에 넣고 시루는 어깨에 메고 물 밖으로 나왔는데 시루는 어깨에 있으나 떡은 화석이 되었다.

암자 앞에 지금도 둥근 돌 두 개가 놓여 있으니 이것이 곧 그것이라고 한다.

폭포의 꼭대기서 동북으로 수십 보를 가면 큰 바위가 뿔처럼 된 것이 있으니 이것이 용각석이다. 성긴 솔을 이마에 이고 있어 까칠한 것이 아득히 쳐다보인다. 우리가 그 밑에 붙어 서니 흡사히 개미가 오이에 붙은 것 같다. 무릇 향산에 유람 온 자 반드시 그 이름을 여기에 새겨 놓고 가곤 하니 돌이 그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온전한 살이 없게 되었구나! 원석공이 불전에 산의 암석을 쪼고 새기는 행동에 대한 기율이 없는 것으로써 한 개의 결함이라고 하며 이를 미워한 것이 진실로 옳다고 나는 공감을 가졌다.

저 멀리 산허리에 하얀 길이 단풍 속으로 호아 들어갔다. 먼 사람 하나가 그 길을 따라가는지 섰는지 알 수 없다. 실오라기로 단풍을 호아 나간 듯한 길은 바늘 자국도 없고 주름살도 없으니 대중할 것이 없기에 나무로써 표대를 삼고 눈여겨보았더니 먼 사람은 깜박하고 없어진다. 그제야 비로소 가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

동으로 수림을 뚫고 불영대로 나갔다. 뜰의 잔디는 가위로 다듬은 듯 곱다랗게 깔리고 앞이 멀어 활터로도 그만이다. 활짝 틔고 평탄하여 볕도 잘 받으니 환경이 가장 말쑥한 데로구나! 골짜기가 서쪽으로 터져 약산의 모습도 보여 주고 있다.

암자에는 서산 대사의 상과 허백, 기타 여러 고승의 초상을 위해 놓았다. 그러나 이 초상들이 다 서로 비슷하니 한 개의 초상도 도무지 믿음성이 없구나!

나무꾼의 길은 바위를 넘어 나가니 서로 잇달려 실 꿰미 같고 시냇물은 언덕을 안았으니 둥글기 활등 같다.

낮 종소리를 들으면서 조원암, 자성암에 들렀다. 이 암자들은 불영대 동편에 있다. 담여 위에서 굽어볼 적엔 나뭇잎이 어찌나 질펀하고 빽빽한지 디디어도 꺼지지 않을 것 같더니 산에서 수십 보 내려와서 다시 고개를 들어 볼 때엔 잎잎이 볕에 빛나고 있어 다만 빨갛고도 말쑥한 겹옷 한 벌을 차려 입은 아름다운 산 모습이 스스로 기쁨과 자랑을 금치 못하며 나를 가지 말라는 듯, 사람들이 보아 주지 않는 것을 한하는 듯하였다.

저녁연기 나는 데로 막 지나려 할 때 귀 익은 말소리가 들리기에 여기가 어덴가 하고 물었더니 보현사라고 중은 대답하는 것이었다. 다시 눈을 돌렸을 때 나는 멍하니 웃어 버렸다. 마치 제 집 사람도 몰라보고 손님으로 안 것과도 같았다. 나는 문득 다시 한 번 놀랐으니

즉 “늘 보는 것도 늘 새삼스레 보나니 그게 이목구비.”라는 말이 곧 이것이다. 나는 왜 보현사인 줄을 모르게 되었던고? 갈 적엔 서로 가고 올 적엔 동에서 온 까닭이다. 그러면 상원암 길을 동으로 잡아 간다면 반드시 쇠줄을 타고 오르는 위험이 없겠구나! 나는 보현사에 도착하여 시 한 수를 읊었다.

관하(서울과 떨어진 지방을 일컬음) 천 리 길에 떠돌아다니더니

별러 별러 늦은 철에 향산을 찾았노라.

종소리 울어 나니 외로운 절 저녁이요

바위에 수놨으니 고운 단풍 가을일세.

맑은 경치 찾아들어 처음에는 즐겼거늘

끝없는 감회 일어 나중에는 심란쿠나.

산중이라 누수 (물시계)도 없는데

고요히 도사려 앉아 듣노라 냇물 소리만...

새벽에 보슬비 내렸다.

17일,

향산을 떠나 용문산으로 향하였다. 떠날 적에 중들은 치하하기를 “이 산에 노시는 동안 풍우가 없었으니 참 복력이 대단하십니다.” 하고, 다시 합장하면서 “일행이 아무쪼록 귀중하신 몸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선(부채)을 들어 사례하였다.

“모두가 그대들 부처의 힘이지 무슨 나의 복력이겠는가. 폐만 많이 끼치고 섭섭한 정을 남기고 훗날 다시 보기로 함세. 부디 잘들 있게.”

비 기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아침 그늘이 땅에 끌리고 있다. 길은 윤택하고 깨끗한데 이따금 나무뿌리들도 드러나 보인다.

중과 담여를 돌려보낸 후 시내가 헐린 다리 서쪽, 돌더미 위에서 나는 나귀를 탔다. 달아나는 연기가 나무를 만나니 제비 꼬리처럼 째져 나가고 흐르는 물결이 잎을 희롱하니 물고기 주둥이가 납신거리는 것 같구나!

오른편으로 향산천을 끼고 30리를 갔다. 날리는 비 이마에 흩뿌리고 모진 바람 정수리를 휘갈기니 나의 갓은 풍겨 떨어져 하마터면 갓끈이 끊어질 뻔하였다. 하인의 다리는 도깨비 같고 나귀 꼬리는 쥐같이 되었다. 유의(비옷)는 물이 뚝뚝 들어 이슬 떨어지는 오동잎 소리로다. 머리를 옷 속으로 움츠리니 고치 속에 든 누에인양, 속으로 자기 젖을 보다가 힐끔 뒷사람을 돌아보았을 때 눈으로는 서로 보고 웃을 수 있으나 입으로는 그 웃는 까닭을 말할 겨를이 없었다.

나귀는 닫고 채찍은 날고 비는 따라 풍긴다. 걸음마다 진창이 빠지고 발굽마다 물이 넘친다. 구름이 온 희천군을 싸고 자욱한 음기가 밀포되어 있다. 향산 동구의 바람이 이것을 안아다가 뭉게뭉게 퍼뜨리더니 음산한 기운이 서로 맞닿아 강에는 잔물결도 일지 않고 들에는 가는 연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모진 바위들도 이 때문에 껌추하고 잎 벗은 나무들도 이 때문에 음침하구나! 이것이 눈을 가져올 바람이다.

강을 낀 길은 모래 아니면 돌이다. 산발이 바위를 품고 삐죽삐죽 내려오다가 강가에서 끊어졌는데 늙은 등걸 뿌리가 많이 바위틈을 뚫고 나와 그 그러쥔 모양이 귀신의 발톱 같았다. 가느다란 넝쿨들은 줄줄이 뻗어 때로 빨간 열매를 맺고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얼기설기 돌틈을 지나 석벽을 돌아 나갔다. 이번에 우리 행로가 반월형을 그리며 나가는데 길이 좁아 말들이 꼬리를 물고 나간다.

비에 젖은 유의가 냉기를 빨아들이니 술에 붉었던 얼굴이 깨고 있다.

객점에 들어가 밥을 먹은 후 하인을 불러 옷을 말리고 말에 콩을 먹이라고 재촉하였다. 하인이 손을 들어 가리키면서 채찍 끝으로 보이는 구름 밑이 바로 용문인데 30리밖에 안 된다고 하였다.

날은 개려고 하건만 냉기는 의연하다. 그래서 떠나기를 주저하고 뜰에서 한바탕 주악을 벌였다. 타는 자, 부는 자, 치는 자가 차례로 앉았다. 각기 자기 악기를 안고 자기 기능을 다하고 있는데 입을 흘겨보는가 하였더니 큰 저 부는 뺨은 움쑥 들어가 성났으며 작은 저 부는 눈을 올롱해서 놀랐으며 해금 타는 자는 처연히 그 무릎을 의지했구나! 주악이 끝나고 술을 필한 후 일어났다.

낮쯤 되어 떠났다. 강을 등지고 동으로 꺾으니 길가에 돌은 윤택하고 언덕은 명랑하다. 그러나 나귀는 진흙에 붙어 다리를 뽑지 못하고 꽁무니로 안장만 까불고 가지 못하니 자는 소를 탄 셈이다. 동반자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두어 마장 가는 것이 10리 가는 힘은 든다고 하였다. 뭉친 구름 한 떼가 비를 몰고 지나가니 바람도 또한 이를 따른다. 바삐 비옷을 입고 모질게 채찍을 가했더니 나귀 또한 귀를 쫑긋하고 알아채어 시원스레 나간다. 꼬리를 바싹 두 다리 사이에 넣었으나 빗물이 꼬리를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다. 그 비쭉거리며 급히 달아나는 양이 가상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구나!

길가 집에 얼른 들어가 술을 좀 마셔 거나하였다.

나머지 비가 이미 지나가고 얼럭구름이 가운데가 트이니 햇볕이 구름을 넘어 내려 쏘아 마치도 바위 구멍에서 쏟아지는 폭포와도 같다.

삽시간에 구름은 또 변하여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모양이 마치 논벌의 청갈매를 갈아엎어 보습 자리가 번복됨과 같았다. 이윽고 또 변하여 짙고 옅게 먹물로 그린 모란꽃처럼 호방하게도 거꾸로 바로 뿌옇게 그림을 그려 놓았다. 또 좀 있다가는 주름을 수없이 잡아 놓았으니 여기에는 섬들이 삥 둘러 있고 오리, 갈매기 들이 출몰하는 형상도 있었다. 그러다가 옆으로 넘쳐흐르고 가로 내리쏘는 볕이 사람의 옷에 빛나는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듯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일으켜 내니 도대체 이것을 누가 하는 것이며 누가 시키는 것인가.

석양을 띠고 용문 앞 동네에 와서 담여를 탔다. 마중 나온 중들이 벌여 섰다. 시내 소리와 단풍 빛이 걸음마다 번갈아 나오며 우리를 맞아 준다. 향산에 비하여 깊고 큰 맛은 없으나 토석의 품위가 그곳과 더불어 일반이니 이는 향산의 작은 지맥이다. 용문사에 들어 잤다. 이날 밤에 높은 데는 눈이 왔다.

18일,

일찍 세수하고 조반을 재촉하여 먹은 후 떠났다. 폐지된 불전의 북편 모퉁이에서 담여를 탔다. 관해암에 오르니 암자가 바로 산상에 있다. 멀리 청북을 굽어보니 성곽, 수풀, 흐르는 물, 솟은 산, 이것이 모두 책상 앞에 있는 듯하다. 철옹 일대가 홀로 두드러져 일어났으니 네 개의 바둑돌이 한 개의 백을 치는 것 같다. 서해의 빛이 한편 귀는 육지로 들어오고 두어 치 폭은 하늘에 닿았다. 중의 말이 여기서 해 지는 것을 보는 것이 장관이라 하나 안개 때문에 그것을 기다려 볼 수는 없었다.

백삼이란 것이 있다. 관해암에서 나와서 동북으로 바라보면 어수선한 돌무더기가 산중턱을 덮었으니 이것이 곧 그것이다. 무슨 포대 더미 같기도 하고 쌓았던 탑이 무너진 것같이도 보였다. 가 보면 둥근 놈, 뾰족한 놈, 팔뚝 같은 놈, 손바닥 같은 놈, 무를 뽑아 거꾸로 세운 모양을 한 놈, 공이를 잘라 세운 모양을 한 놈들이 혹은 한 길, 혹은 한 자 정도로서 대소 형태를 각각 달리하고 떼떼로 서로 모였다. 뾰족한 놈이 우뚝 서서 한 개의 둥근 놈을 인 것도 있고 등에 여럿을 업고 길게 시렁처럼 된 놈도 있으며 혹 서로 이어선 놈도 있는데 이런 것은 공교하게도 그 인 자리를 서로 절반씩 따 내어 사개를 맞춘 것 같으며 혹 서로 주춧돌처럼 상대하여 한 개의 가름대를 받친 놈도 잇다. 처음 가서 볼 때에는 그것들이 와르르 무너질까 무섭더니 차차 그것을 밟아 보고는 마침내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용감히 흔들어도 보고 굴려도 보았으나 원체 그 뿌리가 깊이 물려져 덜그럭 소리는 나면서도 튼튼히 지탱되고 있다. 또 이끼의 성질이 밀랍 같아서 꺼분꺼분하니 다른 돌과 휩싸여 서로 잘 붙는다. 그 근방에는 유난스럽게 돌 셋이 솥발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런히 서 있는 것과 사립짝문을 세운 것 같이 된 것도 있다. 백삼이란 명칭은 그것이 하얗게 쌓이고도 벌여 섰다는 뜻이다.

밭 사이에 돌들을 두두룩이 종 모양같이 모아 놓고는 거기에 소다리 뼈를 갖다 놓고 축원하는 자는 농부이며 길가에 돌들을 수두룩이 보루같이 쌓아 놓은 데다가 헌 신짝을 달아매고 축원을 하는 자는 행인이다. 그러나 백삼 같은 것은 그 누가 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한 골짝을 그득히 덮어 한 마장이나 뻗어 나가게 한 것이 어찌 사람의 일이라고야 하겠는가? 혹자는 말한다. 볼수록 더욱 기이한 것은 비록 무너져도 역시 그대로 된다고.

백삼으로부터 앞으로 더 전진하여 수십 보 맞은편을 바라보니 구름 어린 눈이 산상에 둘렀다. 위에는 겨울, 아래는 가을이로구나! 높은 데 서 있는 나무는 잎이 이미 하나도 없어졌다. 나는 호기심에 끌려 한번 올라가서 눈을 차도 보고 밟아도 보려 했더니 지척에서 바람이 문득 일어나 받쳐 입은 갖옷(털옷)이 베옷이나 입은 듯이 추워지니 일변 놀랍고 일변 애석히 그저 돌아 내려왔다. 중은 산상을 가리키며, “눈으로써 경계를 삼읍지요. 저 뒤는 양덕현계인데요.” 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암자 두셋을 거쳤다. 퇴락한 서까래, 깨진 기와, 퇴는 쓸지도 않았다. 창구멍으로 들여다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자고 있다. 중 하나는 기갈이 심하여 부엌에 나가 물을 마시고 있으며 늙은 중 하나는 마을로 쌀을 빌러 나갔다 한다.

가지 없는 나무가 오뚝오뚝 하얀 빛을 띠고 섰으니 은으로 도금을 하였는가? 잎 없는 나무가 멀리멀리 희미한 자줏빛을 띠고 있으니 노을에 물이 들었는가?

해가 벌써 질녘이 되었으니 돌아올 수 없어 용문사에서 하룻밤 더 자게 되었다. 중의 방으로 넓기가 관외(지방)에서는 아마 제일일 것이다. 실내에서 검춤을 시켰다.

19일.

산을 이별하고 철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단풍이 이미 시들어 올 때의 그것이 아니로구나! 떠날 때 중들을 돌아보면서 나는 섭섭한 뜻을 말하였다.

“어찌 타일에 다시 못 올 줄을 알며 비록 온다 한들 또 어찌 반드시 서로 만날 줄을 알겠는가? 산수는 비록 의구하되 그대들을 못 본다면 타일의 회포를 내 또한 어찌하리! 가을 9월, 물과 돌, 아름다운 이 산 이 땅, 만수홍엽 중에서 나는 그대들을 이별하네그려!”

중들을 동구까지 나와 나를 전송하고 돌아갔다. 모래는 희고 볕은 밝으니 낮이 긴 것만 같았다. 나는 몸이 나른하여 몸은 나귀 등에 맡기고 꿈은 안장 위에 실었다. 때마침 길가의 닭소리 들리자 문득 반겨 바라보니 저편의 마을 터가 부럽구나!

낮쯤 되어 철옹 동문에 다다르니 두 선비가 문로에서 쉬고 동자 두어 명이 있었다. 술을 가지고 나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그 두 선비는 같이 놀던 윤생과 명생이다. 나의 탐승한 이야기도 하고 그들의 은근한 정을 치사도 한 후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들어갔다.

향산 구경은 진실로 총총하였다. 다 찾고 다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름난 절과 좋다는 경치는 대개 보았다. 불지, 견불, 빈발 등 여러 절까지 다 돌아보았다. 다만 비로봉과 향로봉은 길이 이미 황폐되어 한번 올라가 요해를 바라보지 못한 것이 한이다.

무릇 유람이란 취미로써 주를 삼나니 시일에도 제약됨이 없이 아름다운 데를 보거든 마음껏 놀며 친구를 이끌고 회심처를 찾아야 한다.

복잡하고 떠들썩거리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대개 속된 사람들은 절간에서 기생을 끼고 시냇물 가에서 음악을 베푸나니 이야말로 꽃 아래서 향을 피우며 차 속에 과실을 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는 와서 “산중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 어떻던가?” 하고 묻기에 나는 “나의 귀는 다만 물소리와 중의 낙엽 밟는 소리만을 들었노라.”고 대답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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